美연구팀 시뮬레이션 분석 결과 “범인의 재킷에 혈흔이 없었던 건 총 쏠 때 생기는 소용돌이 영향 피의 진행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될 때 생기는 기체 소용돌이가 피의 진행 방향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혈액 궤적. 미국 아이오와대 제공
2003년 2월 이른 아침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고급 주택가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비틀스의 마지막 정규앨범인 ‘렛잇비(Let It Be)’ 등 유명 음반의 프로듀서로 명성을 떨친 필 스펙터의 집이었다. 여배우 레이나 클라크슨은 입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고, 함께 있던 스펙터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당시 스펙터가 입고 있던 하얀색 재킷에서는 아주 작은 핏자국 18개가 발견됐을 뿐 피가 거의 묻지 않았다. 스펙터는 이를 근거로 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클라크슨이 총에 입을 맞추며 우발적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총에서는 스펙터의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범죄 현장에 남아 있는 피는 법과학에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서영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공학부 안전과 흔적연구실장은 “혈액 방울은 유체역학적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며 “원심력에 의해 피가 날아온 위치를 역추적하면 범행이 이뤄진 위치를 찾아낼 수 있고, 혈흔의 형태를 이용해 흉기도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 실장은 “총기에 의한 근접사의 경우 총알 뒤쪽에 있는 가해자의 옷이나 손, 총구 안쪽에는 총기의 폭발력에 의한 분무혈흔이 남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스펙터는 클라크슨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가 총을 쏜 범인이라면 적어도 재킷에는 더 많은 양의 후방비산혈흔이 남아 있어야 했다.
결국 12명의 배심원단은 만장일치의 유죄 평결에 이르지 못했고, 2007년 미결정심리(mistrial)가 선언됐다. 이후 스펙터는 재심에서 결국 2급 살인 혐의가 인정돼 2009년 19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하지만 피가 거의 묻지 않은 깨끗한 흰 재킷의 미스터리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채 기억에서 사라졌다.
최근 알렉산더 야린 미국 아이오와대 기계공학부 교수팀은 0.223인치 구경의 장총에 돼지 피를 채우고 단열재 재질의 발포 고무판을 향해 발사하는 실험을 진행해 18년간 미궁에 빠졌던 ‘스펙터 재킷’의 비밀을 풀었다. 발포 고무판은 피해자의 몸을, 돼지 피는 총알 겸 사람 피 역할을 했다.
연구진은 피가 고무판에 충돌한 뒤 튕겨 나가는 과정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해 분석했다. 예상대로 총알(피)이 피해자(고무판)에게 박히자 그 충격으로 피는 총을 쏜 범인을 향해 분출됐다. 그런데 총알이 빠른 속도로 총구를 떠나는 과정에서 총구 주변에 기체 소용돌이가 형성됐고, 피해자에게서 분출된 핏방울들이 이 소용돌이에 부딪히면서 10분의 1 크기로 쪼개졌다. 게다가 이 핏방울들은 범인을 향하다가 기체 소용돌이의 움직임에 휩쓸리면서 피해자 옆과 뒤로 궤적을 바꿨다.
스펙터는 올해 1월 수감 중 사망했다. 사인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