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식 김종영 김환기 백남준 등 ‘서예’ 수련한 작가 11명 작품 전시 전통 미학에 새로운 서구예술 접목… 현대미술 선대 작가들 재평가 기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 ‘Neon TV―Love is 10,000miles’(1990년). 화면 위에 ‘愛情萬里(애정만리)’라고 적은 작가의 붓글씨를 볼 수 있다. 나란히 전시된 ‘Neon TV―22nd Century fox’(1990년) 화면 위에도 붉은 물감으로 한자를 써놓았다. 김종영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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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미술관 개관 20주년 기념전 ‘화가의 글씨, 서가의 그림’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서예 수련의 성취는 기대보다 더디게 나타난다. 도드라지는 차별성을 재빨리 드러낼 수완을 겨루는 시대에 서예는 그래서 생경한 영역이다. 4월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는 개관 20주년 기념전 ‘화가의 글씨, 서가의 그림’은 서(書)와 화(畵)를 별개로 여기지 않던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 한국 현대미술 첫 장에 낙관을 남긴 작가 11명의 작품을 아우른 전시다.
밝을 명(明)자 쓰기를 연습하는 행위가 추구하는 목표는 빛을 품은 듯한 획을 빚는 것일지 모른다. 해와 달의 모습을 본떠 합친 글자인 까닭이다. 지하 1층 제1전시실에 걸린 곽인식(1919∼1988)의 ‘명, 원’(1986년)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한번에 이렇게 쓰기까지 몇 번 같은 획을 그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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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 위에 유채로 그린 김환기의 1967년 작 ‘무제’(왼쪽 사진)와 최규명의 ‘고려’(연도 미상). ⓒ환기재단·환기미술관,우석뮤지엄 제공
박춘호 학예실장은 “이번에 회고하는 작가들은 스타일의 확립과 과시에 연연하지 않고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전통 미학을 새로 받아들인 서구 예술에 접목해 함께 확장시킬 방도를 차분하게 고민했던 이들”이라며 “기본기를 치열하게 가다듬는 노력이 결국 온전한 자유로움에 이르는 길임을 작품을 통해 실증적으로 알려준다”고 말했다.
3전시실의 김환기(1913∼1974)와 백남준(1932∼2006)은 서예 수련에 본격적으로 정진하지는 않았던 작가들이다. 하지만 백남준의 프린트 작품 ‘心’(연도 미상)과 비디오아트 ‘Neon TV’(1990년) 연작은 그가 지녔던 필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김환기의 1967년작 무제 세 점 역시 사물의 구성 요소를 분석해서 재구성하는 추상 회화의 원리가 서예의 근본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추상화가 한묵(1914∼2016)의 서예 작품 네 점도 마찬가지다.
서예와 문인화에 뿌리를 두고 자신만의 추상화 세계를 구축한 이응노(1904∼1989), 동양화에 서구 미술 기법을 가미했던 황창배(1947∼2001), 서예의 회화성에 천착했던 최규명(1919∼1999) 등의 작품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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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