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정인이’ 막는 학대 시그널… 타박상 등 신체에 상처 있거나 어눌한 말-무기력 증세도 위험신호… 어른들이 눈여겨봐야 학대 막아 “누가 때렸나” 직설적 말은 역효과… 마음 열도록 자연스럽게 대화를
5일 경기 양평군의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서 시민들이 양부모의 학대로 사망한 입양아 정인이를 추모하고 있다. 정인이는 생후 16개월이던 지난해 10월 서울 양천구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 뒤 화장돼 이곳에 묻혔다. 양평=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40대 여성 A 씨는 지난해 5월 경남 창녕의 한 길거리에서 B 양(9)과 마주쳤다. B 양의 옷 곳곳엔 얼룩이 가득했고 신발도 신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A 씨는 B 양에게 다가가 인사말을 건넸다.
“배가 고프다”는 B 양과 인근 편의점에 들러 먹을 걸 사주며 가벼운 얘기를 주고받았다. 적잖이 경계심을 푼 B 양이 부모의 학대를 털어놓은 건 한참 뒤부터였다. 바로 지난해 불에 달궈진 프라이팬으로 손발을 지지는 등 극심한 학대를 당하다 4층 아파트 베란다로 탈출했던 아이였다. 아동보호기관 전문가는 “A 씨가 차분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B 양은 또다시 지옥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전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학대 아동들은 작은 기척에도 깜짝 놀라는 경향이 있다. 별일 아닌데도 위축되는 아이들도 의심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붕년 서울대 소아청소년정신과 교수는 “일단 가벼운 신체적 접촉조차 두려워하거나 경계하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볼 수 없다. 영양 상태가 매우 부실해 보이거나 계절에 맞지 않는 옷차림도 학대 시그널 가운데 하나”라고 전했다.
의사 표현이 서투른 영·유아들은 신체 구석구석을 잘 살펴봐야 한다. 상대적으로 대화나 옷차림으로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더욱 세심한 관찰이 요구된다. 김붕년 교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영·유아들이 상해까지 당하는 사고는 드물다”며 “의심스러운 타박상이나 골절이 있다면 일단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아가 잘 울지 않는 것도 이상 행동이다.
아이가 학대를 받았다는 의심이 든다면 다음 단계로 아이가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확실한 정황이나 증거를 찾았다고 직설적으로 ‘학대’를 언급하면 오히려 아이는 움츠러들어 진실을 밝히기 어려워진다.
마음을 열고 털어 놓는 상황이 왔더라도 표현이 신중해야 한다. 정운선 경북대 소아청소년정신의학과 교수는 “학대 아동은 부모 같은 가까운 어른에게 당하는 경우가 잦다. 질문을 할 땐 학대 주체를 단정 짓지 말고 ‘누가 널 아프게 했니’처럼 포괄적으로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강승현 byhuman@donga.com·김태성·이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