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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워야 이긴다[오늘과 내일/김종석]

입력 | 2020-10-24 03:00:00

LPGA ‘연장 승부사’ 박세리 김세영 “우승 열망 클수록 욕심 버렸다”




김종석 스포츠부장

누구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맞는다. 40일 남은 수능이거나, 얼어붙은 채용시장에서 어렵사리 갖게 된 입사 면접이 될 수도 있다. 모의고사에선 문제를 잘 풀거나, 가상 인터뷰에서는 말이 술술 나오다가도 정작 실전에선 지나치게 떨어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요즘 방송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골프 스타 박세리는 예능 초보지만 카메라 앞에서 좀처럼 흔들리는 법이 없다. 생방송에도 여유 넘치는 모습이 전성기 현역 선수 시절 당당한 발걸음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한국 선수 최다인 25승을 올린 박세리는 연장전에서 6승 무패를 기록했다. 골프대회 연장전은 대부분 서든데스(sudden death) 방식이다. 죽음이란 단어에서 보듯 한 홀 결과가 운명에 직결된다.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5번 이상 연장전을 치른 선수 가운데 승률 100%는 그가 유일하다. 대표적 멘털 스포츠인 골프에서 강심장의 대명사로 불릴 만하다.

최근 LPGA투어에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김세영은 롤 모델 박세리만큼이나 뒷심이 강하다.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에서 통산 5승 가운데 4승을 역전승으로 채운 그는 LPGA투어 진출 후 연장전에서 4승 무패를 기록했다. 4차례 연장전을 모두 첫 판에서 이겼는데, 그것도 버디 3번과 이글 1번으로 승리를 확정지었다. 마지막 라운드에 늘 입는 빨간 바지가 마법을 부린다는 찬사를 듣는 이유다.

공동묘지에서 담력을 키웠다는 얘기까지 들었던 박세리에게 강한 뒷심의 비결을 물었더니 “우승에 대한 열망이 커질수록 마음을 내려놓고 플레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훈련법을 소개했다. “무작정 공을 많이 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실제 경기에서 맞닥뜨리는 상황이나, 실수에 대처하는 요령을 수없이 반복 연습했다.” 김세영도 잠들기 전에 연장전, 1타 차 등을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자주 한다.

김세영은 태권도 공인 3단이다. 박세리는 중학교 때까지 육상선수로 뛰었다. 다양한 운동을 접하며 응용력을 키우고, 체력을 강화한 덕분에 연장전에서도 지치지 않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부사로 불리는 김세영이지만 LPGA 메이저대회에서는 28번 도전하는 동안 정상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우승 문턱에서 자멸한 적도 많다. “욕심이 앞섰고 쉽게 감정에 휘말린 탓이다. 평상심을 유지하며 돌아갈 줄 알게 되면서 꿈을 이뤘다.”

역대 한국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최다인 14개의 홈런을 날린 이승엽은 올림픽, 아시아경기 등 주요 대회에서도 거포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 그도 한국시리즈 타석당 삼진은 24.4%로 정규시즌(16.3%)보다 많다. 게스 히팅(상대 투수의 볼 배합을 읽고 다음 구질과 코스를 예측하는 타격)의 대가인 이승엽이 ‘한 방’에 승패가 좌우되는 단기전에서 더 두려움 없이 휘둘렀다는 방증이다. “큰 경기일수록 상대 견제는 심해지고 힘든 볼이 들어온다. 주위 기대감은 증폭된다. 그럴수록 머리가 복잡해선 안 된다. 많은 생각보다 그저 내 실력과 경험을 믿어야 한다.”

김연아가 피겨 여왕에 오른 것은 올림픽에서 자신의 기량을 120%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라 온갖 부담감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소 실력을 빙판에 쏟아낸 결과다. 골프 전설 보비 존스는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거리는 두 귀 사이에 있는 5.5인치”라고 했다. 머리(마음)가 몸(신체)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의미. 맹자는 부동심(不動心)을 강조한다. 이는 내면적 수양이 필수라고 한다. 목표를 향할 때 땀과 눈물은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 결정적인 시험대에 섰을 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용의 눈동자를 찍고 비로소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김종석 스포츠부장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