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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타국 野지도자 테러 의심 받고… 적대국과 수교 숨은 활약

입력 | 2020-09-26 03:00:00

음지에서 양지로… 무대 넓혀가는 세계 정보기관들




미국 중앙정보국(CIA),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이스라엘 모사드, 독일 연방정보국(BND), 영국 해외정보국(MI6), 사우디아라비아 정보총국(GIP) 등 세계 주요국 정보기관들의 활동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밥 우드워드 미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은 15일 출간한 ‘격노’를 통해 CIA가 한때 북한의 체제 전복을 목표로 했다고 썼다. 7일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 한복판에서 괴한에게 납치됐다가 기소된 여성 야권지도자 마리아 콜레스니코바, 지난달 20일 독극물 중독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난 러시아 야권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사건의 배후에는 FSB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각국 정보기관은 이 같은 반(反)정부 인사 제거, 적성국 지도부 교체, 주변국 지도자 포섭 같은 ‘음지형 업무’를 넘어 적대국과의 평화협상 및 수교 같은 ‘양지형 업무’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 최근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등 ‘3국 수교’(아브라함 협정)의 실무는 요시 코헨 모사드 국장이 주도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사우디, 오만, 모로코, 수단 등 다른 아랍국과 이스라엘의 추가 국교 정상화 작업도 지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관들은 약 6주 앞으로 다가온 미 대선을 앞두고 대선 결과 및 국제 정세와 자국에 미칠 영향을 파악하기 위한 작업에도 분주하다.


○ ‘양지형 활동’에 주력하는 모사드


이스라엘은 국내 정보를 담당하는 신베트, 해외 정보를 맡은 모사드, 군 정보를 담당하는 아만 등 3개 정보기관을 두고 있다. 이 중 모사드는 과거 이란 핵 과학자, 팔레스타인 정치인 등을 속속 암살하는 등 음지형 활동에 치중했지만 최근 아랍국과의 잇따른 수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책 수립 등에도 역할을 하고 있다.

WP와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올해 3, 4월경 코로나19 1차 유행이 한창일 때 모사드를 이용해 산소호흡기, 마스크, 진단 키트 같은 핵심 의료용품을 확보했다. 전 세계적으로 산소호흡기가 크게 부족했지만 모사드의 활약으로 이스라엘은 무려 200여 대를 확보했다.

올해 2월 한국의 코로나19 감염자가 급증할 때 이스라엘은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한 대한항공 여객기를 승객 하차 없이 바로 돌려보냈다. 우리 정부에 사전 설명도 없었다. 전격적인 입국 금지의 배후에도 모사드가 있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중동 외교가 관계자는 “당시 이스라엘 외교부는 한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 사전 통보 없는 입국 금지를 우려했다. 하지만 모사드와 보건부 등 코로나19 대응 담당 부서가 강경책을 고집했다”고 전했다.

중동 외교가에선 모사드가 오래전부터 이란 핵 대응을 위해 사우디 등 아랍 주요국 정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이란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보유한 모사드를 아랍국이 부러워했다는 평가가 많다. 걸프만 수니파 아랍국은 시아파 맹주 이란을 견제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 전제군주 체제에 불만이 많은 자국 내 반대파를 다뤄야 하는 이중고를 안고 있다. 이런 문제를 다루려면 모사드 같은 정보기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긴다는 의미다.

중동 소식통은 “사우디 GIP와 모사드가 걸프만 아랍국의 잇따른 수교를 주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바레인처럼 경제, 안보 양면에서 사우디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수교 협상 자체를 바레인 정부가 아닌 GIP가 주도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 벨라루스 내정 관여하는 FSB

미 외교안보 매체 포린어페어스(FA)는 8일 러시아가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격인 FSB를 이용해 벨라루스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합병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정보요원, 정치공학자, 사이버 인력, 안보 전문가 등 공작을 위한 인력을 대거 파견했다고 덧붙였다.

벨라루스 정보기관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KGB란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운영방식 또한 과거 KGB와 현 FSB를 최대한 벤치마킹하고 있다. 벨라루스에서는 지난달 9일 친러 성향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현 대통령의 재집권이 결정된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의혹으로 한 달 넘게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벨라루스에 파견된 러시아 정보요원들은 루카셴코 반대파에 대한 납치 및 협박 같은 강경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가톨릭 신자와 러시아 정교 신자, 상류층과 서민층 등 기존 사회 갈등을 이용해 양측 분열도 가중시키고 있다.

러시아가 정보 공작을 통해 벨라루스 내정에 개입하는 것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병합 때의 후폭풍을 의식한 때문이란 관측이 나온다. 당시처럼 군사력을 앞세웠다가는 해당 국가와 국제사회의 극렬한 반발이 불가피하다. 이에 부작용은 작으면서 손쉽게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정보기관 활용을 선호한다는 의미다.

이런 FSB의 악명은 나발니 암살 시도에서도 드러났다. 나발니는 KGB 시절부터 러시아 요원이 요인 암살에 사용한 화학물질 ‘노비초크’에 중독됐다. 현재 나발니를 치료하고 있는 독일 측은 사건 배후에 러시아 정보기관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자국 정보기관과 의료진이 노비초크 중독을 밝혀내자마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러시아가 답해야 한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슈피겔 등에 따르면 브루노 칼 BND 국장은 “나발니에게 쓰인 노비초크의 독성이 과거보다 더 강하다”고 했다. 단순 위협이 아닌 공개 암살을 목표했다는 의미다.

푸틴 정권은 2018년 3월에도 영국 솔즈베리에서 전직 정보원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을 노비초크로 암살하려 했다. 영국의 습한 날씨가 노비초크의 독성을 희석시키지 않았다면 부녀 모두 숨졌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MI6는 이후 수사를 통해 “러시아 정보기관이 노비초크를 사용했고 푸틴 대통령이 배후에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격노한 테리사 메이 당시 총리는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했다.

유럽 정보기관이 러시아의 대형 공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역량을 키웠다는 분석도 나온다. 각국 정부 자료에 따르면 MI6와 BND는 각각 연간 예산이 30억 파운드(약 4조4656억 원), 9억8000만 유로(약 1조3373억 원)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이다. 한 정보 전문가는 “냉전 때부터 KGB 등이 유럽 곳곳에서 워낙 많은 공작을 진행했고 이로 인한 피해도 컸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과 독일 역시 정보기관의 덩치를 불린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 적성국 지도자 교체 노리는 CIA

CIA는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취임한 뒤 북한 전담 조직 ‘코리아미션센터’(KMC)를 설립했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교체하기 위한 비밀 첩보 활동도 계획했다. 우드워드 부편집인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을 미리 제거했다면 이라크전 같은 큰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있었다는 CIA 내부 평가가 북한 지도부 교체 시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CIA가 개입한 각국 비밀전쟁을 다룬 ‘CIA 블랙박스’의 저자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국제정치)는 “CIA는 북한처럼 군사 및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닌 나라의 지도부 교체와 암살을 고민한다. KMC 설립과 운영에서도 이런 부분을 적극 반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1월 미국이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드론으로 공개 사살할 때도 CIA가 모사드로부터 얻은 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은 솔레이마니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이동할 때 이용한 항공편을 시리아 내 이스라엘 정보원이 CIA에 알려줬다고 보도했다. 두 기관은 북한산 무기 및 군사기술이 이란, 시리아,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등에 유입되는 과정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CIA는 러시아, 중국 등 적성국 정보기관이 11월 3일 미 대선에 개입할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22일 “CIA가 ‘러시아가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미 대선에 또 개입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분석했다.


○ 패권 경쟁 속에 정보기관 역할 확대

최근 미국에서는 카타르 알자지라방송의 온라인 계열사 ‘알자지라플러스’의 지위를 둘러싸고 카타르와 UAE가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UAE는 2017년 카타르의 친이란 외교 등을 문제 삼아 단교했다. 이후 로비스트를 대대적으로 고용해 미 사회에 전방위적 로비를 펼쳤다. UAE 측은 “알자지라는 카타르 국익을 위해 활동하기 때문에 언론이 아닌 정부 산하조직 혹은 로비 기업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미 법무부는 15일 “알자지라플러스는 외국인에이전트등록법(FARA)에 따라 해외 에이전트로 등록해야 한다”며 UAE 편을 들었다.

발끈한 카타르 측은 “UAE와 사우디가 자국 정보기관을 이용해 미국에 계속 잘못된 정보를 흘렸다. 트럼프 행정부가 11월 대선 전 ‘이스라엘-UAE-바레인’ 3각 수교란 외교 성과를 내기 위해 일방적으로 UAE 편을 들고 있다”고 반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면 카타르 측이 새로 출범할 미 민주당 정권에 로비를 해 법무부의 기존 결정을 뒤집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각국 정보기관이 자국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데다 강대국 간 패권경쟁 격화, 강력한 권위주의 지도자 ‘스트롱맨’의 잇따른 집권 등이 이어지고 있어 각국 정보기관의 활동 범위 확대 및 경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김재천 교수는 “권위주의 성향이 강한 지도자일수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 외교 협상, 정책 협의 등을 꺼린다. 투명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지만 빨리 결과를 볼 수 있는 정보기관 이용을 선호한다”고 진단했다.

미국과 러시아에 비해 첩보 전쟁에 늦게 뛰어든 중국의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해 나갈지도 관심사다. 서구 정보기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차이나머니’를 앞세운 정부의 막대한 투자, 공산주의 사회의 폐쇄성 등이 국가안전부가 활발히 활동할 발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주석으로 취임하자마자 공산당 내에 국가안전위원회를 설립해 국가안전부, 공안, 외교부, 군대 등 각기 다른 조직이 각각 보유했던 기밀 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또 파키스탄, 시리아, 이란 등 반미 국가는 물론 전 세계에 대규모 정보요원과 산업 스파이를 파견했다. 2018년 6월 미 백악관은 ‘중국의 경제적 침략’ 보고서를 통해 “중국 국가안전부가 4만 명 이상의 산업 스파이를 통해 세계를 염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