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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같은 藥인데 여성이 복용땐 잘 듣지 않는 까닭은

입력 | 2020-07-18 03:00:00

◇보이지 않는 여자들/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황가한 옮김/464쪽·1만8500원·웅진지식하우스




아이폰 액정 크기는 평균 여성이 한 손으로 쥐기 버거울 정도다(위쪽 사진). 대부분의 약은 임상시험을 남자 위주로 했기 때문에 여성이 복용했을 때 쉽게 낫지 않거나 아예 아무런 약효가 나지 않기도 한다. 젠더 데이터 공백이 낳은 현상이라고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지적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천재 과학자 하면 우스꽝스럽게 혀를 빼문 백발의 남성이 떠오르지 않는가. 교과서를 비롯한 과학 서적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인슈타인 이미지다. 퍼뜩 생각나는 과학자는 대개 남자다. 뉴턴 케플러 테슬라 오펜하이머 세이건 호킹…. 그럼 여성 천재 과학자는 없었던 걸까. 천만에. DNA가 2개의 사슬과 인산 뼈대로 이뤄진 사실을 처음 발견한 과학자는 로절린드 프랭클린이라는 여자였다. 그 노벨상은 남자들이 탔지만.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이 책의 저자는 주장한다. 여성 천재 과학자는 역사에서 지워졌을 뿐이라고.

아이폰 액정의 평균 크기는 5.5인치(139.7mm)다. 평균적 여자의 손으로는 겨우 쥘 정도다. 핸드백에 맞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천만에. 평균적 남자의 손 크기를 기준으로 해서 그렇다. 미국식품의약국(FDA)에 따르면 여성에게서 두 번째로 많이 보이는 약의 부작용은 아무 약효도 없다는 것이다. 남성에게는 효과가 있는 약인데 그렇다. 여성의 신체가 복잡해서 그런가. 천만에. 약의 임상시험 대상이 남체(男體)이기 때문이다. 우울증같이 여자가 남자에 비해 훨씬 많이 걸리는 병에서조차 동물시험에 암컷을 쓰지 않는다.

저자는 무의식적인 듯 또는 의도적인 듯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아이폰 등에서처럼 디폴트(기본, 표준)는 언제나 남성인 현상을 ‘젠더 데이터 공백’이라고 표현한다. 사적 영역이든 공공 영역이든, 제설 작업 순서든 남녀 화장실 배치든, 알고리즘 구성이든 음성인식 ‘시리’든 대다수 분야의 설계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여성은 투명인간처럼 배제된다는 것이다.

‘별도 지표가 없는 이상 남성’이라는 이 같은 접근 방식이 낳은 젠더 데이터 공백의 결과는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 소수자 위치로 끌어내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사무실 표준 온도는 1960년대 40세의 몸무게 70kg인 남성을 기준으로 정해지고, 미 사관학교의 교복은 여성 입학을 허용한 지 35년 만인 2011년에야 여성의 엉덩이와 가슴에 맞게 제작된다.

이를 시정하려는 요구에 대해 불만에 찬 남성들은 말한다. “요즘은 여자들이 어디에나 나오잖아요.” ‘어디든 남자 것’,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디든 중산층 백인 남성 것’이라는 ‘신화’에 금이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남자 목소리와 남자 얼굴로 가득한 문화 속에서 자란 어떤 남자들은 그들이 당연히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이나 공간을 여자들이 빼앗아갈까 봐 두려워한다.’

이런 공포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인 ‘여걸’ 셰릴 샌드버그의 말처럼 ‘이 악물고 밀고 나가야’ 하는 걸까. 그것도 필요하지만 저자는 ‘남자아이들이 더 이상 공공 영역을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지 않게 될 때까지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워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에게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다.

데이터 공백을 메우려면 설계나 의사결정 단계에서부터 여성의 의견이 제시되고 받아들여지도록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을 늘려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권력과 영향력 있는 지위에 오르는 여자가 늘어날수록 명백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남자들처럼 쉽게 잊지 않는다.’

다만 할당제에 따른 여성 정치 참여의 좋은 사례로 이 책에서 인용하는 한국 여성 의원들이 최근 성추행 피해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