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패권 경쟁 사이에 낀 한국… 틈새서 줄 타는 전략 이제 안 통해 국론-다자주의 기반한 원칙외교 필요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
먼저 미중 갈등의 본질을 살펴보자. 일각에서는 ‘공격적 현실주의’와 ‘세력전이 이론’(경쟁 국가가 기존 패권국가보다 강해지는 현상)을 들며 패권국가와 도전국가 사이의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중심으로 미중 패권 충돌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며 최후의 단계다. 학계의 논쟁은 또 다른 과정과 시각을 제시한다. 세력전이 이론가인 A F K 오건스키는 국제사회가 무정부 상태가 아닌 힘의 피라미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배국가가 자국에 가장 유리한 국제 규범과 질서를 만든다고 보았다. 따라서 상대적 이익을 가장 많이 가져가는 지배국가가 기존의 규범과 질서에 가장 만족이 크고, 강대국, 중견국, 후진국 순으로 불만이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제 환경이 변해 어느 순간 기존의 규범과 질서 속에서 현재의 중국과 같이 도전국가가 가장 큰 상대적 이익을 차지하며 지배국가와의 국력 차이를 점차 따라잡는다면 지배국가가 아닌 도전국가가 가장 큰 만족을 느낄 것이라는 반론이 등장했다. 또한 패권국가들은 국제법과 제도가 어느 순간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고 도리어 제약한다고 느낀다면 이를 무시, 철회, 또는 수정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되었다.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의 개혁을 요구하고, 일부 국제기구와 체제에 지원을 중단하고 탈퇴를 선언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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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합의한 정체성과 가치, 그리고 국익을 정의한 ‘원칙’의 확립이 필요한 시기다. 전략적 모호성은 민감한 현안들을 단기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미중 모두로부터 압력은 더욱 강해졌으며 전략적 신뢰는 저하됐다. 원칙의 확립은 미중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단지 국민들이 합의한 가치와 국익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리는 것이다. 2019년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미국의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전략에 지지를 표하는 동시에 역내 분열 및 특정 국가(중국) 배제에는 반대라는 원칙 표명으로 자국의 가치와 국익을 설명했다.
물론 원칙 표명은 미중 어느 한쪽과의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이란이 미군에 의해 혁명수비대 솔레이마니 장군을 잃었을 때 보여준 ‘제한적 손상(limited damage·서로 관계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취하는 최소한의 비판이나 보복)’과 호주가 홍콩 보안법에 대한 유감 표시를 영국, 캐나다와 함께 발표한 다자주의 외교의 활용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에 필요한 것은 미중 사이의 주요 현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건전한 논쟁을 거치며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국민적 합의를 기반으로 한 정부의 입장 표명은 미중 사이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반면 남남 갈등과 정치적 진영싸움은 양 강대국으로부터 더 큰 압박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G7 회의에서 한국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향후 미국과 중국은 한국을 끌어당기려 우호적으로 다가올 수도, 더욱 압박을 가해올 수도 있다. 한국은 초청된 즐거움보다는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며, 전략적 모호성보다는 원칙이 필요한 시기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