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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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선 사정은 어떤가요?”“아주 평온하지.”
“거짓말 마라. 온 국민이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국민을 속일 셈이냐. 대체 너는 조선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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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폭도라고?”
친일파 민원식을 척살한 뒤 도쿄경시청에서 조사받고 있는 양근환. 사진 위로 겹쳐진 글씨는 주소와 이름을 쓴 그의 자필이다.
1921년 6월 7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양근환(1894~1950) 1차 공판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를 토대로 그가 민원식을 처단하기 직전 상황을 재구성해본 것입니다.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은 일본과 조선이 합쳐 탄생한 신일본의 발전에 조선인도 기여해야 한다는 ‘신일본주의’를 주창해 일제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했지만, 1921년 2월 16일 숙소인 도쿄역호텔 14호실에서 최후를 맞았죠. 양근환은 ‘2000만 동포의 치욕’인 민원식의 몽매함을 깨우쳐줄 생각으로 그를 찾아갔는데,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독립운동가들을 폭도로 매도해 말다툼 끝에 흉기로 찔렀다고 진술했습니다.
동아일보는 보도통제가 풀린 직후인 3월 2일자 3면에 11개의 기사를 실어 양근환의 활약을 대서특필했습니다. 단순 사실보도에 그치지 않고 양근환의 형과 친구까지 취재해 그의 성격과 인간적 면모도 부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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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7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양근환의 1차 공판 모습. 타원형 사진은 방청 온 그의 일본인 부인 가츠코와 딸.
이에 따르면 기골이 장대한 양근환은 담대하고 협객 기질이 다분했습니다. 20대 초반 조선보병대에 다닐 적엔 일본인들이 자신을 보고 ‘요보’(조선 사람을 비하해 부른 말) 운운하자 홀로 여럿을 제압했고, 민원식을 척살한 뒤 도쿄로 호송될 때도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독립을 희망한다. 일본인들도 조선 독립을 자기 일처럼 여겨 달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일본경찰도 그를 국사범(國事犯)으로 대우해 결박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양근환은 불의를 참지 못했지만 원래 심성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맨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국수와 인삼을 팔고, 신문배달과 철공소 일을 해 어렵게 대학에 다니면서도 동료 고학생들에게 돈과 밥을 나눠줬습니다. 거사 직후에는 꽃을 사들고 집에 돌아와 오랫동안 못 볼 네 살, 두 살 딸에게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진작 상하이로 가 독립운동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발목을 잡은 딸들이었죠.
12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친 양근환(아래)이 1933년 2월 23일 그의 딸, 친형과 함께 동아일보를 방문했다.
동아일보는 이후에도 양근환의 공판기, 수감 생활, 감형 소식, 그리고 그의 가족의 근황까지 낱낱이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양근환도 자신의 심경을 담은 옥중편지를 여러 차례 동아일보에 보냈습니다. 홍수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하자 ‘하느님은 왜 우리 땅을 그렇게도 울리시는지. 나의 괴로움을 잊고 종일 울었습니다’(1925년 8월 12일자)라고 동정했고,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조롱에 든 새는 항상 날기를 잊지 못하고, 외양간에 매인 말은 항상 달음질을 생각합니다’(1925년 9월 26일자)라 표현했죠.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무정한 아비를 평생 못 만난다 한들 원망하지 마라. 이 아비의 사랑은 좀 더 크고 깊은 데 있다’고 조국에 몸을 바친 비장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1929년 12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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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
원문
閔元植(민원식) 氏(씨) 暗殺者(암살자) 逮捕(체포)= 二十八(이십팔) 歲(세)의 延白(연백) 靑年(청년) =
댱기에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가랴다가
이십사일 오후 두 시에 션중에서 톄포
련루자 혐의로 두 명은 동경에서 톄포
지난 이월 십륙일 동경 정거장호텔 뎨 십사호 실에서 참정권 운동 차로 두류 중이던 국민협회댱 민원식(民元植‧민원식) 씨가 엇더한 자의게 돌연히 비수로 찔리워 직사하얏다 함은 이미 세상에서 아는 바어니와 그 후 이 사건에 대하야 당국으로부터 범인 수색에 관한 일체 사항에 대하야는 전부 신문지에 게재함을 금지하얏슴으로 신문에 발표를 못하얏더니 일일에야 비로소 금지 명령이 해제되얏슴으로 이에 그 대강을 보도하는 바이라.
민원식 씨를 암살한 하수인은 지난 이십사일 하오 두 시에 댱긔수상서『長崎水上署‧장기수상서』 중도순사『中島巡査‧중도순사』의 손에 긔선 팔번환 삼등실에서 톄포되얏는대 그는 황해도 연백군 은쳔면 련남리『黃海道 延白郡 銀川面 蓮南里‧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 본적을 둔 량근환『梁槿煥‧양근환』이라 하는 당년 이십팔 세의 청년이오. 민원식 씨가 암살당한 후로 동경 경시텽에서는 즉시 대활동을 개시하야 각처로 경계선을 느리고 수색하든 중 우입구 조도젼학권뎡 륙십오번디 조선물산상회 리은종(牛込區 早稻田鶴卷町 六十五番地 朝鮮物産商會 李殷宗‧우입구 조도전학권정 육십오번지 조선물산상회 이은종)의 집에 함끠 사는 량근환(梁槿煥‧양근환)을 진범인으로 인증하고 사진과 인상서(人相書)를 써서 젼국 각 경찰서에 배부하는 동시에 함끠 잇든 정측영어학교 학생(正則英語學校 學生‧정칙영어학교 학생) 신현셩(申鉉聲‧신현성)을 이십일일에 인치 취조하고 유송(有松‧유송), 토옥(土屋‧토옥) 두 경부는 량근환이가 도망한 형적이 잇는 하관으로 츌장을 하며, 한편으로 그의 처 가쓰고(勝子‧승자)와 리은종도 인치 취조하얏다더라.
出帆(출범)하기 二(이) 時間(시간) 前(전)에
팔번환 삼등실에서 톄포
횡빈(橫濱‧횡빈)을 떠나 신호(神戶‧신호)를 지나 북만주로 가는 고사환(高砂丸‧고사환)이 이십삼일 오젼 아홉 시 댱긔(長崎‧장기) 항구에 다앗는대 년긔 이십칠팔 세 된 조선인이 내리는 것을 보고 수상경찰서의 중도(中島‧중도) 순사가 취조한 결과 류창할 일본말로 자긔는 자성현 구자군 행구촌 길전졍부(慈城縣 久慈郡 幸久村 吉田政夫‧자성현 구자군 행구촌 길전정부)이라고 대답함으로 그대로 노아주엇는대,
그는 서빈뎡 소림려관(西濱町 小林旅館‧서빈정 소림여관)에서 하루 저녁을 잣는대 저녁에도 태연자약하게 나서서 시가를 구경하고 도라다니다가 하로 저녁을 잔 후에 이십사일 오후 네 시에 떠나서 상해(上海‧상해)로 가는 팔번환(八幡丸‧팔번환) 삼등 려객으로 탄 것을 쫏차가서 톄포하얏는대 마참 동경에서 온 인상서(人相書) 바든 전긔 중도 형사는 가만히 생각한 즉 어제 고사환에서 나리던 사람인 것이 분명함으로 곳 쫏차가서 잡은 것이오.
그 배가 떠날 시간은 오후 네 시이요, 수상경찰서에서 동인을 톄포하기는 오후 두 시이니 결국 두 시간만 틀녓드면 상해로 도망하얏슬 터이라더라.
國事犯(국사범) 待遇(대우)
태연자약히
호송되얏다
톄포된 그는 수상경찰서에서 시 검사(柴 檢事‧시 검사)의 취조를 맛치고 이십오일 오후 여섯 시에는 감방(監房‧감방)으로 드러가셔 젼후를 모르고 실컷 잣는대 검사의 심문에 대하야는 류창한 일본말로 대답하며 그 대답한 태도는 임검한 검사를 놀내이엇스며
이십륙일 오젼 일곱 시 오십륙 분 문사(門司‧문사) 정거장에 도착하는 최후의 객차로 내리엇는대 옷깃에 신굴조(新堀組‧신굴조)라고 색이인 로동자 복색에 검은 중절모를 쓰고 조금도 겁내는 모양이 업시 각 신문사에서 나온 신문사 사진반에게 향하야 『포켓트』에 손을 꾹 찌르고 태연히 섯섯스며 문사 경찰서의 류치장에서는 『휘스키』를 함부로 먹고 밥도 잘 먹으며 아모 심중의 불안한 일이 업시 긔차 중에서도 경관은 국사범인(國事犯人‧국사범인)으로 취급하야 결박도 하지 아니하얏다더라.
護送(호송) 中(중)의 氣焰(기염)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
그는 호송하는 경관에게 대하야 말하되 『나는 학문도 정식의 교육은 밧지 못하얏다. 그러나 의론으로 일본인에게는 지지 안는다. 일본사람은 조선 사람 중에는 조선 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도 잇고 불찬성하는 사람도 잇는 줄로 생각하지마는 엇지 그럴 리가 잇스랴. 조국(祖國‧조국)의 독립은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 헌병뎨도가 변하야 순사제도가 되고, 무단정치(武斷政治‧무단정치)가 문화정치가 되는 것은 결국 지엽 문제(枝葉 問題‧지엽 문제)이라. 조선 독립을 일본사람도 자기 일갓치 생각하야 주기를 바란다고 호긔잇게 긔렴을 토하얏다더라.
下手(하수) 後(후)의 行動(행동)
륙일 오후 오시 경에 도라와
저녁 먹고 나가서 행위불명
그가 동경을 가기는 지금으로부터 오년 젼에 가서 일본인 두석쳔창(頭石川倉‧두석천창)의 누의 『가쓰고』와 혼인을 하야 네 살 먹은 맛딸 『사다고(定子‧정자)와 둘재딸 『아이고』(愛子‧애자)가 잇는대 작년 구월에 뎐단『田端‧전단』으로부터 현재 주소인 조도뎐 학권뎡(早稻田 鶴卷町‧조도전 학권정) 리은종의 집으로 와서
리은종과 신현셩은 이층에 잇고 량근환의 가족은 아래층에 잇서서 낫이면 중국 국수와 인삼을 팔고, 밤이면 인력거를 끌고 일본 대학에 단기엇섯는대 중간에 퇴학을 하고 항상 시세에 대한 불평을 품고 잇다가 그와 가튼 일을 행하얏스며, 십오일 밤에는 밤이 깁흔 후에 집에 도라와서 무슨 깊흔 생각을 하고 십륙일 아츰에 일즉 이러나서 밥을 먹고 나아간 후 오후 오 시경에 자긔 집에 도라와서 삼월오복점(三越吳服店‧삼월오복점)에서 사온 꼿을 어린 아해들에게 노나준 후 저녁을 먹고 술을 두어 잔 마신 후 가라앉지 못하는 모양으로 애를 쓰다가
이층으로 올나가서 리은종(李殷鍾‧이은종)이가 버서노은 겹옷을 아래에 입고 솜옷을 껴입고 검정 하오리에 검은 띄를 매고 검은 중절모를 쓴 후에 잠간 어대를 갓다 온다고 말한 후에 나가버리엇다.
梁(양)은 步兵隊(보병대) 出身(출신)
경성공업젼습소의 츌신으로
조션보병대에 다닌 일도 잇다
동경역호텔에서 단도로 민원식(閔元植‧민원식) 씨를 암살한 범인은 엇더한 사람인가. 그는 황해도 연백군 은쳔면 련남리 이백십팔번디 량태환의 아우 량근환(黃海道 延白郡 銀川面 蓮南里 二一八 梁泰煥 弟 梁槿煥‧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 이일팔 양태환 제 양근환)(二八‧이팔)이니 어려서부터 성질이 룡맹하고
마음이 급격하며 무슨 일이든지 남에게 지지 아니하고자 하는 성질이 잇섯다. 점점 자라 나히 십오륙 세에 이르매 주위의 사정에 차차 불평을 폼기 시작하고 십팔 세에 백쳔읍 내에 조선 사람의 경영으로 설립한 사립 동명학교(東明學校‧동명학교)를 졸업하고 이십세 경에 경성에 올나와서 공업젼습소(工業傳習所‧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시국에 대한 불평이 더욱 심하야 자긔 집에 내려간 후에도 가산을 도라보지 아니하고 각처로 방랑하다가 톄육을 힘쓰기 위하야 일시는 조선보병대에 들어갓다가 중도에 다시 나와서 지금으로부터
오년 젼에 공부에 뜻을 두고 적수공권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혹은 서리 아참에 우유 수레를 끌고 눈 오는 저녁에 신문 배달을 하며 혹은 쇠마치를 들고 철판상에 일하면서 일본대학(日本大學‧일본대학) 정치과(政治科‧정치과)에 드러가고 □□□더니 이삼년 전에 일본 여자□□인하야 딸 둘까지 나앗는대 그의 본집인 백쳔 읍내에는 홀로 된 그의 어머니와 우흐로 량태환(梁泰煥‧양태환)과 수다한 가족이 잇다더라.
『性格上(성격상)으로 豫期(예기)한 바』
아우의 잡힘과 어머니의
급보를 함끠 듯고 놀내는
량근환의 형, 량진환의 말
이 보도에 대하야 시내 청진동(淸進洞‧청진동) 모 려관에 류하는 량근환의 중형 되는 량진환(梁鎭煥‧양진환)을 방문한 즉 씨는 깜작 놀나며 『나는 처음 드럿습니다. 물론 자긔가 목뎍하든 일을 셩공하얏스닛가 저의 할 일을 한 것이지요. 원래 그 아해가 승격이 급하고 항상 협긔가 만흠으로
언제든지 그러한 일을 저질를 줄 알앗지마는 결국 일을 당하고 보닛가 모든 일이 꿈속가치 생각되옵니다. 부친은 원래 각처로 방랑하시든 터임으로 어머니 홀로 우리 삼형뎨를 기르는대 자연 구차한 살림에 공부를 식히지 못하얏스나 그 애는 어려서부터 재조가 잇서서 한문으로는 소학(小學‧소학)과 맹자를 읽고, 동명학교와 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보병대에 들기는 톄육을 배호기 위함이요, 운동에는 특히 취미를 가지고, 읽는 서적은 대개 정치에 관한 서적이엇습니다. 물론 저는 결심이 잇서 그러하얏겟지마는 집에 계신
어머님은 오즉 놀나시지 아니할 것이옵니다. 부모가 자손 사랑하기는 아- 일반이지마는 더욱 그 애는 끗 아들임으로 어머니끠서 유난스럽게 사랑하섯습니다. 동경에 건너가서 공부하는 동안은 매양 눈에 발피서서 여름에 참의 갓흔 것이 잇스면 항상 그 애 생각을 하고 눈물을 흘니시고, 겨울에 날이 치워도 객지에서 오작 춥겟느냐고 항상 근심하섯슴니다. 더욱 애석한 것은 지금 집에서는 그 애가 그럿케 된 것은 깜앗케 모르시고 우리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시니 그 애에게 뎐보를 노아서 속히 오도록 하라고 하얏슴니다. 그 애가 그럿케 나가 잇슴으로 년젼에 부친 상사 때에도 종신도 하지 못하야 항상 그것을 평생의 원한이라 말하고 그 후에 부친의 상청에 드러와 울든 모양이 눈에 선-하옵니다. 그런대 또 모친의 종신도 못하게 되면 그 마음이 엇더히겟슴닛가』하면서 눈에 눈물이 고히고 한숨을 쉬일 뿐이더라.
元來(원래) 俠客(협객) 氣質(기질)
자식을 죽이랴 한 일도 잇고
일본인을 칼로 친 일도 잇다
량근환의 일에 대하야 동경에서 함끠 공부하든 그의 친구인 모 씨는 말하되 내가 량근환을 알기는 내가 동경에서 건너오기 략 일개월 전인대 그 때에 량 군은 신경이 극히 흥분하야 세상의 모든 일에 불평을 품고 비관이 심하야 도모지 세상에 살 자미가 업다고 하얏슴니다. 원래
빈한한 사람이라 학비가 넉넉지 못하야 로동을 하야가며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다가 근리에는 그것을 맛치고 그대로 잇섯는대 성질이 담대하고 과격하며 긔가 잇슴으로 그가 로동을 하야 근소한 돈을 벌면 흔히 동무고 학생에게 난호아 준 일이 잇고 그는 일본 여자와 동거하며 조도뎐 학권뎡(早稻田 鶴卷町‧조도전 학권정)에 집을 두엇섯는대 때때로 고학생을 다리고 가서 밥을 하야 먹이는 일이 잇섯스며, 항상 말하기를 남은 해외에서 사생을 불고하고 일을 하는대 이럿케 편안히 잇는 것이 불안하다고 말하더니 그여히 그런 짓을 하얏슴니다.
항상 상해를 가고자 하얏스나 그가 일본 부인에게 딸 둘을 나아서 하나는 세 살이요, 하나는 두 살인대 그가 먼 곳을 가게 되면 그 자식을 누가 살닐가 하는 일도 고심하든 끗헤 결국 그 아해를 물에 띄이어 버리려하다가 인정에 그럿치 못하야 고만두엇다는 처량한 이야기도 잇고, 그가 조선보병대에 다닐 때에도 울분한 심회로 달 밝은 밤에 남산공원에 안젓는대 일본 사람들이 와서 길을 물을 때에 대답이 불순하얏슴으로 일본인들은 『요보』의 버르장머리로다 하고 꾸즈지닛가 량 군은 『무엇 요보라는 무엇이냐』하고 서로 말닷홈이 되야 싸홈이 되엿는대
원래 량 군은 긔골이 강장함으로 함부루 치닛가 일본인들은 쫏기어 조선은행 압까지 내려왓는대 조선은행 압헤서는 일본사람의 수효가 점점 느러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따림으로 할 수 업시 칼을 뽑아 몃 사람을 상하야 경찰서에 톄포된 일도 잇섯스나 취중의 일임으로 오십일 구류를 지낸 후에 백방된 일이 잇섯슴니다. 이것으로 보드래도 그가 얼마나 대담한 지를 알 수 잇슴니다 하고 말하더라.
梁槿煥(양근환)
東京(동경) 着(착)
련루자와 함끠
사실취조 개시
국민협회댱 민원식(閔元植‧민원식) 씨 암살범인 양근환(梁槿煥‧양근환)은 댱긔(長崎‧장기)에서 팔번환(八幡丸‧팔번환)에 올나 장차 중국 상해(上海‧상해)로 건너가고자 하는 것을 그곳 수상경찰서에서 체포하야 재작 이십팔일에 동경에 도착하야 경시청에서 취조키를 시작하얏는대 한편으로는 그 공모자로 경시텽에 구류 중에 잇든 신현셩(申鉉聲‧신현성), 리은종(李殷宗‧이은종) 두 사람도 취조를 밧게 되얏더라. (동경 특뎐)
暗殺(암살)한 原因(원인)
방금 조사 즁
민원식(閔元植‧민원식) 씨를 암살한 원인에 대하야 강 경시총감(岡 警視總監‧강 경시총감)은 상해 가정부의 내명에 의하야 행한 것 갓다 말하나 혹은(梁槿煥‧양근환) 자긔의 생각으로 암살을 하얏슬지도 몰나 목하 취조 중이라더라. (동경 뎐보)
連累者(연루자) 三名(삼명)
대련에서 톄포
량근환의 공범이 아즉 다- 톄포되지 못하얏슴으로 련속 엄탐 중인대 지나간 이십륙일 정오에 동 사건의 련루자인 듯하고 수렴 만히 난 남자 세 명을 대련 수상경찰서(大連 水上警察署‧대련 수상경찰서)에 톄포되엿는대 그는 횡빈(橫濱‧횡빈)에서 떠난 고사환(高沙丸‧고사환)으로 대련에 향하야 이십륙일 도착하얏는 바 방금 민정서(民政署‧민정서)에 구류 취조 중이라더라. (대련)
현대문
민원식 씨 암살자 체포= 28세의 연백 청년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려다
24일 오후 2시에 배 위에서 체포
연루 혐의로 2명은 도쿄에서 체포
지난 2월 16일 도쿄역호텔 제14호실에서 참정권 운동 차 두루 돌아다니고 있던 국민협회장 민원식 씨가 돌연 어떤 자의 비수에 찔려 즉사했다는 사실은 이미 세상이 아는 바이다. 그 후 당국이 이 사건에 대해 범인 수색에 관한 사항 일체를 신문에 게재하는 것을 금지해 보도하지 못 했는데, 3월 1일에야 비로소 금지명령이 해제됐으므로 그 대강을 보도하는 바이다.
민원식 씨를 암살한 살인자는 지난 24일 오후 2시 나가사키 수상경찰서의 나카지마 순사의 손에 기선 ‘팔번환’ 3등 실에서 체포됐는데, 그는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에 본적을 둔 양근환이라 하는 올해 28세의 청년이다. 민원식 씨가 암살당한 후 도쿄 경시청은 즉시 대대적인 활동을 개시해 경계선을 각처로 확대하고 수색하던 중 우입구 조도전학권정 65 조선물산상회 이은종의 집에 함께 사는 양근환을 진범으로 특정하고 그의 사진과 인상서류를 전국 각 경찰서에 배부하는 동시에 함께 있던 세이소쿠영어학교 학생 신현성을 21일에 구인해 취조하고 아리마츠, 쓰치야 두 경부는 양근환이 도주한 것으로 보이는 시모노세키로 출장을 갔으며, 한편으로 양근환의 처 가츠코와 이은종도 붙잡아 취조했다.
배가 항구를 떠나기 2시간 전에
‘팔번환’ 3등 실에서 체포
요코하마를 출발, 고베를 경유해 북만주로 가는 배 ‘고사환’이 23일 오전 9시 나가사키 항구에 닿았는데, 27, 28세쯤 된 조선인이 내리는 것을 보고 수상경찰서의 나카지마 순사가 취조한 결과 유창한 일본말로 자기는 자성현 구자군 행구촌에 사는 요시다 마사오라고 대답해 그대로 놓아주었는데,
그는 나가사키 서빈정의 소림여관에서 하루저녁을 잤는데, 저녁에도 태연자약하게 밖으로 나와 시가를 구경하고 돌아다니다 하루저녁을 잔 뒤 24일 오후 4시에 떠나 상하이로 가는 ‘팔번환’ 3등 여객으로 탄 것을 쫓아가 체포했는데, 마침 도쿄에서 온 인상서류를 받은 앞서 말한 나카지마 형사는 가만 생각해보니 어제 ‘고사환’에서 내린 사람인 것이 분명해 곧 쫓아가 잡은 것이다.
그 배가 나가사키에서 출항할 시간은 오후 4시인데 수상경찰서에서 양근환을 체포한 것이 오후 2시이니 결국 2시간만 지체했더라면 양근환은 상하이로 피신했을 터였다.
국사범 대우
태연자약하게
호송됐다
체포된 양근환은 수상경찰서에서 시바 검사의 취조를 받고 25일 오후 6시에 유치장으로 들어가 전후를 모르고 실컷 잤는데, 검사의 심문에 대해 유창한 일본말로 대답했으며, 그 태도는 현장에 있던 검사를 놀라게 했으며
26일 오전 7시 56분 모지 역에 도착하는 마지막 객차로 내렸는데, 옷깃 ‘신굴조’라고 새긴 노동자 복장에 검은 중절모를 쓰고 조금도 겁내는 기색이 없이 각 신문사에서 나온 사진기자들을 향해 포켓에 손을 꾹 찔러 넣은 채 태연히 서기도 했다. 모지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내키는 대로 위스키를 마시고 밥도 잘 먹으며 심중에 불안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기차 안에서도 경관은 그를 국사범으로 취급해 결박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호송 중의 기염
“조국의 독립은
누구든 바란다”
그는 호송하는 경관에게 말하기를 “나는 학문도 정식으로 교육받지는 못했지만 논쟁으로 일본인에게는 지지 않는다. 일본사람은 조선인 가운데에는 독립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줄 알지만,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조국의 독립은 조선 사람 누구든지 희망하는 것이다. 헌병제도가 변해 순사제도가 되고, 무단정치가 문화정치가 되는 것은 결국 지엽적인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일본인들도 조선의 독립을 자기 일 같이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호기 있게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살인 후의 행동
6일 오후 5시경 돌아와
저녁 먹고 나간 뒤로는 행위 불명
그는 지금부터 5년 전에 도쿄로 가 일본인 두석천창의 누이 가츠코와 혼인해 네 살 먹은 맏딸 사다코, 둘째 딸 아이코를 두었는데, 작년 9월 전단에서 현재 주소인 조도전학권정 이은종의 집으로 왔다. 이은종과 신현성은 2층, 양근환의 가족은 아래층을 썼다.
양근환은 낮이면 중국 국수와 인삼을 팔고, 밤에는 인력거를 끌어 번 돈으로 니혼대학에 다녔는데 중간에 퇴학하고 항상 시국에 대한 불평을 품고 있다가 그와 같은 일을 행했다. 15일 밤에는 밤이 깊은 후 집에 돌아와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16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나간 뒤 오후 5시경 자기 집에 돌아와서 삼월오복점에서 사온 꽃을 어린 아이들에게 나눠준 후 저녁을 먹고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술도 두어 잔 마신 뒤
2층으로 올라가 이은종이 벗어놓은 겹옷 위에 솜옷을 껴입고 검정색 일본식 겉옷에 검은 띠를 매고 검은 중절모를 쓴 뒤 잠깐 어디를 다녀오겠다고 말한 후 나가버렸다.
양근환은 조선보병대 출신
경성 공업전습소 출신으로
조선보병대에 다니기도 했다
도쿄역호텔에서 단도로 민원식 씨를 암살한 범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 218 양태환의 아우 양근환(28)이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용맹하고 심성이 격렬해 무슨 일이든지 남에게 지지 않으려 했다. 점점 자라 나이 15, 16세가 되자 주변의 상황에 차차 불평을 품기 시작했다. 18세에 백천읍 내에 조선인이 설립해 경영하는 사립 동명학교를 졸업하고, 20세쯤 경성에 올라와 공업전습소를 마쳤는데 시국에 대한 불평이 더욱 심해져 자기 집에 내려간 뒤에도 집안을 돌아보지 않고 각처로 방랑하다 체육에 힘쓰기 위해 한때 조선보병대에 들어갔지만 도중에 다시 나와서
지금부터 5년 전에 공부에 뜻을 두고 맨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혹은 서리 내린 아침에 우유 수레를 끌고, 눈 오는 저녁에는 신문배달을 하며, 혹은 쇠망치를 들고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니혼대학 정치과에 들어가 공부하더니, 2~3년 전에는 일본 여자와 혼인해 딸 둘까지 낳았는데, 그의 본가인 백천읍에는 홀로 된 그의 어머니와 위로 형 양태환과 많은 가족이 있다고 한다.
“성격상 예상했던 바”
아우의 붙잡힘과 어머니의
급보를 함께 듣고 놀래는
양근환의 형, 양진환의 말
이 보도에 대해 시내 청진동 모 여관에 머물고 있는 양근환의 둘째 형 양진환을 방문하니 그는 깜짝 놀라 “나는 처음 들었습니다. 물론 자기가 뜻한 일을 성공했으니 제 할 일을 한 것이지요. 원래 그 아이가 성격이 급하고 항상 의협심이 강해
언제든지 그런 일을 저지를 줄 알았지만, 결국 일을 당하고보니 모든 일이 꿈속 같습니다. 부친은 원래 각처로 방랑하시던 터여서 어머니 홀로 우리 삼형제를 기르셨기 때문에 자연히 구차한 살림에 공부를 제대로 시키지 못했지만 그 애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서 한문으로는 소학과 맹자를 읽고, 동명학교와 공업전습소를 졸업했어요. 운동에 특히 취미가 있어 체육을 배우려는 목적으로 조선보병대에 들어갔고, 읽는 책은 대개 정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아이는 결심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집에 계신
어머님은 오죽 놀라시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부모가 지식 사랑하기는 다 같겠지만, 근환이는 막내아들이어서 어머니께서 유난스럽게 사랑하셨습니다. 도쿄에 건너가 공부하는 동안 번번이 눈에 밟혀 어머니는 여름에 참외 같은 것이 있으면 항상 그 애 생각에 눈물을 흘리시고, 겨울에 날이 추워도 객지에서 오죽 춥겠느냐고 항상 근심하셨습니다. 더욱 애석한 것은 지금 집에서는 근환이가 그렇게 된 것은 까맣게 모르는데, 어머니 병환이 위중해 그 아이에게 전보를 놓아 속히 오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 애가 그렇게 나가 있는 바람에 연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임종도 하지 못해 항상 그것을 평생의 한이라 하고 그 후 부친의 혼백을 모신 곳에 들어와 울던 모양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또 모친의 마지막도 못 보게 되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하며 눈에 눈물이 고이고, 한숨을 쉴 뿐이었다.
원래 협객 기질
자식을 죽이려 한 일도 있었고
일본인을 칼로 친 일도 있었다
양근환의 일에 대해 도쿄에서 함께 공부하던 그의 친구 모 씨는 말하되 “내가 양근환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도쿄에서 건너오기 약 한 달 전인데, 그때 양 군은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져 세상 모든 일에 불평을 품고 비관이 심해 도무지 세상 살 재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원래
빈한한 사람이라 학비가 넉넉지 못해 노동을 해가며 공부했고, 공부를 하던 중 근래에는 그것을 마치고 그대로 있었는데, 성질이 담대하고 과격하며 기(氣)가 셌던 그는 노동을 해 작은 돈이라도 벌면 종종 동무 고학생에게 나눠준 일이 있고, 일본여자와 동거한 조도전학권정 집에 때때로 고학생을 데리고 가 밥을 해 먹이는 일도 있었으며, 항상 말하기를 남은 해외에서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일하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있는 것이 불안하다고 하더니 기어이 그런 짓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항상 상하이에 가고자 했으나 그가 일본 부인에게서 딸 둘을 낳아 하나는 세 살, 하나는 두 살인데 그가 먼 곳을 가버리면 그 자식을 누가 먹여 살릴까 하는 일도 고심하던 끝에 결국 그 아이를 물에 띄워 버리려하다가 인정 상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만뒀다는 처량한 이야기도 있고, 그가 조선보병대 다닐 때에는 가슴 속에 울분이 쌓여 달 밟은 밤 남산공원에 앉아 있는데 일본인들이 와서 길을 묻자 대답을 불순하게 하는 바람에 일본인들은 ”‘요보’(일본인들이 조선 사람을 비하해 부른 말)의 버르장머리“라고 꾸짖으니 양 군은 ”뭐? 요보가 뭐냐“고 맞서 서로 말다툼을 벌이다 싸움으로 번졌는데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양 군이 닥치는 대로 치니까 일본인들은 쫓겨 조선은행 앞까지 내려왔는데 조선은행 앞에서는 일본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때려 할 수 없이 칼을 뽑아 몇 사람을 상하게 해 경찰서에 체포된 일도 있었으나 취중의 일이라는 점이 참작돼 50일 구류를 산 뒤에 풀려난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대담한지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양근환
도쿄 도착
연루자와 함께
사실 취조 개시
국민협회장 민원식 씨 암살범 양근환은 나가사키에서 ‘팔번환’에 올라 장차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려다 그곳 수상경찰서에서 체포해 그저께인 28일 도쿄에 도착해 경시청에서 취조를 시작했는데, 한편으로는 그 공모자로 경시청에 구류 중인 신현성, 이은종 두 사람도 취조를 받게 됐다.
암살한 이유
방금 조사 중
민원식 씨를 암살한 이유에 대해 오카 경시총감은 상해임시정부의 밀명에 따라 행한 것 같다고 말했으나 혹시 양근환 자신의 생각으로 암살했을지도 몰라 바로 지금 취조하고 있다.
연루자 3명
다롄에서 체포
양근환의 공범이 아직 다 체포되지 못했으므로 계속 엄밀하게 정탐 중인데, 지난 26일 정오에 이 사건의 연루자인 듯한 수염이 많은 남자 3명이 다롄 수상경찰서에 체포됐는데, 그는 요코하마에서 떠난 ‘고사환’으로 다롄을 향해 26일 도착한 바, 방금 민정서에서 잡아 가둔 후 취조 중이라 한다. (다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