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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생상품 고위험 방심한 투자자-당국 ‘원유ETN 폭락사태’ 불렀다[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0-05-20 03:00:00

원유ETN 대량손실 왜 생겼나… 유가 급락하자 주식처럼 매수 몰려
1월 하루평균 254억 수준서 4월 거래대금 4126억으로 폭증
“기름값 오를 것 같아서 투자”
투자 몰리자 유가와 괴리율 커져 시장가격 예측하기도 어려워져
금융당국, 뒤늦게 ‘위험’ 경보… 투자문턱 높이는 규제도 신설
파생상품 신뢰회복 방안 찾아야




이건혁 경제부 기자

“기름값 오를 것 같아서 투자한 것뿐인데….”

올해 3월경부터 주식 투자 관련 인터넷 카페나 토론방이 원유 상장지수증권(ETN) 투자 문제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연초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던 국제유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수요 감소가 예상되면서 곤두박질쳤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의 유가 전쟁으로 공급 과잉 우려까지 겹치자 하락폭은 확대됐다. 4월 20일(현지 시간)에는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선물(先物)이 배럴당 ―37.63달러로 떨어져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국내 개인투자자들은 이를 저가 매수 기회로 받아들였다. 가장 손쉬운 투자처로 여겨졌던 원유 관련 ETN이나 상장지수펀드(ETF)에 자금이 몰려들었다. 유가가 배럴당 10달러에서 30달러로 오르면 수익률은 200%, 만약 수익률이 기초자산 변동률의 2배인 레버리지 상품에 투자한다면 수익률 400%…. 개인투자자들은 하루 평균 수천억 원을 원유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했다. 금융당국이 “위험하다”고 경고를 줬지만 쇠귀에 경 읽기였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이 투자의 끝은 결국 개인투자자들의 대량 손실, 그리고 파생상품 시장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로 마무리돼 가고 있다.

○ ETN은 고난도 파생상품


이번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ETN이란 무엇인지부터 짚어봐야 한다. ETN은 해외지수나 주식, 선물이나 옵션, 원자재 등을 기초지수로 만든 상품이다. 거래소에 상장돼 있으며 일반 주식처럼 실시간 거래할 수 있다.

재테크의 필수 상품으로 자리 잡은 ETF와 비슷한 면이 많다. 다만 ETF가 자산운용사들이 종목이나 지수를 편입해 운용하는 ‘펀드’인 반면, ETN은 증권사가 자기신용으로 발행하는 ‘파생상품’이라는 점이 다르다. ETN의 경우 기초지수 움직임이 그대로 수익률에 반영되기 때문에 기초지수가 하락하면 ETN에서도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ETN을 발행한 증권사가 파산하면 투자금을 날릴 수도 있다.

ETN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어 몇 개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WTI에 투자하는 ETN을 예로 들어보자. 이 ETN의 기초자산은 WTI다. 기초지수는 WTI 선물을 담아 만든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나 다우존스의 ‘WTI 지수’다. 국내에서 거래 중인 ETN의 시장가격은 기초지수인 ‘WTI 지수’에 따라 움직인다. 평상시라면 WTI가 5% 오르면 WTI 지수도 5% 오르고, 환율 변동이 없다고 가정하면 국내의 WTI ETN 가격도 5% 오른다. 변동률이 2배로 움직이는 레버리지 ETN이라면 가격은 5%의 2배인 10% 수익이 발생한다. 지수 움직임과 반대로 수익률이 결정되는 인버스 레버리지라면 반대로 10%의 손실을 본다.

국내 ETN 가격은 WTI 지수의 움직임과 동일해야 하지만 여러 이유에 의해 오차가 발생한다. 이를 ‘괴리율’이라고 한다. 괴리율이 커지면 ETN을 발행한 증권사는 증권을 추가 상장해 가격을 실제 가치에 가깝게 조정한다. 증권사들은 ETN을 거래하려는 투자자에게 이처럼 복잡한 내용을 담은 위험고지서를 배포한 뒤 이를 충분히 인지했다는 서명을 받는다. ETN 투자는 공격투자형 투자자(1등급)로 판정돼야만 할 수 있다.

○ 거래대금 일평균 4000억 원 넘자 가격 구조 붕괴


ETN은 금융 상품 중에서도 비주류에 속했다. ETN 시장의 평화는 국제유가가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깨진다. 올해 초만 해도 배럴당 40∼50달러 선을 오르내리던 국제유가는 수요 부족, 공급 과잉 우려로 폭락을 거듭했다.

투자자들은 국제유가 하락을 일시적이라고 보고 국제유가가 기초자산인 ETN을 집중적으로 사들인다. 특히 레버리지 ETN에 매수세가 집중됐다.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1월 하루 평균 254억 원 수준이던 ETN 거래 대금은 4월 4126억 원으로 폭증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원유 관련 ETF와 ETN의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지난해 62억 원 수준이었으나 올해는 5월까지 2667억 원에 이른다. 같은 기간 개인투자자 비중은 52.3%에서 77.1%로 늘었다.

투자자가 몰리자 기초지수의 가격 움직임과 동일하게 움직이도록 설계된 시장가격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적정 호가를 제시하며 가격 조절 역할을 했던 증권사는 밀려드는 투자자를 감당하지 못해 미리 준비했던 유동성이 바닥났다. 그러자 투자자들의 수급만으로 가격이 결정되는 상황으로 돌변했고, ETN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어느 날 WTI가 5% 내렸다고 치자. 그러면 S&P와 다우존스의 WTI 기초지수도 하락하고, WTI 레버리지 ETN의 시장가격은 이론적으로는 10% 내려야 한다. 그런데 유가가 오를 것으로 기대한 투자자들이 과도하게 몰리면서 하락률이 10%에 못 미치거나 오히려 가격이 올라가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 번 괴리율이 커지게 되면, 다음 거래일에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움직임까지 뒤섞이면서 시장 가격을 예측하기도 어려워진다.

○ 이익 본 사람 없는 ‘원유코인’

18일(현지 시간) WTI 7월 선물 가격은 배럴당 31.82달러로 마감하며 올해 3월 13일 이후 약 2개월 만에 30달러 선을 회복했다. 여기서 투자자들의 첫 번째 불만이 나온다. 3월 WTI가 30달러일 때 삼성 레버리지 WTI 원유 선물 ETN의 경우 주당 가격이 3000∼5000원 선이었는데, 왜 현재는 640원(18일 종가 기준)에 그치냐는 것이다. 여기에는 레버리지 상품에 있는 ‘복리 효과’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1000원짜리가 50% 하락한 뒤 다음 날 50% 오르면 1000원이 되는 게 아니라 750원이 된다. WTI가 급변하면서 복리 효과는 더욱 크게 나타났다.

두 번째 불만은 누가 이익을 봤느냐는 것이다. 투자자들은 유동성을 공급한 증권사를 의심하지만 국내 증권사들과 금융당국 등은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ETN 거래를 중개할 뿐 직접 거래에 참여해 차익을 내지 않는다. 또 유동성을 추가로 공급하기 위해서도 상당한 비용을 썼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매수자가 몰리면서 ETN 가격이 기초지수보다 높아졌을 때 보유하고 있던 ETN을 판 투자자는 원래 감당해야 했던 것보다 적은 손실을 봤으니 이익을 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면 높은 시장가격에 ETN을 사들인 투자자는 기초자산과 지수가 올라도 괴리율 탓에 가격이 떨어지면서 더 많은 손실을 보고 있다.

○ 잇단 경보 무시한 투자가… 결국 규제 강화로

원유에 투자하는 레버리지 ETN에 투자자가 몰리면서 가격이 왜곡되고 있다는 경고가 처음 울린 건 올해 3월 9일이다. ETN을 발행한 증권사들이 가격 왜곡을 경고하고 긴급하게 유동성을 공급해 가격 조정에 나섰지만 개인투자자들의 매수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유가 하락폭이 커질수록 반등을 기대한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한 달이 지난 4월 9일 금융감독원은 원유 파생상품에 대해 2012년 6월 소비자경보 제도 도입 후 처음으로 소비자 경보 최고 등급인 ‘위험 경보’를 발령했다. 그래도 시장이 진정되지 않자 같은 달 23일 한 차례 더 위험 경보를 보냈다. 한국거래소는 지난달 13일에야 가격이 왜곡된 ETN에 대해 매매 체결 방법을 실시간 체결에서 단일가 매매 방식으로 바꾸고, 가격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매매 정지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금융위는 17일 ‘ETF·ETN 시장 건전화 방안’을 통해 레버리지 상품에 투자하려는 투자자에게 최소 1000만 원의 예탁금을 받는 규제를 신설했다.

원유 ETN 거래가 혼탁해진 건 상품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당장의 수익률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한 투자자들에게 1차 책임이 있다. 하지만 거래소와 금융당국 역시 파생상품 거래가 폭증하는데도 상당 기간 손을 놓고 있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긴 어렵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이번 사태로 인해 힘겹게 자리를 잡아가던 파생상품 시장이 신뢰를 잃고 규제 강화로 성장 동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며 “이번 사태를 성장통으로 여기고 투자자, 증권사, 금융당국이 건전하게 시장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건혁 경제부 기자 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