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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서 첫 아리랑 공연… 고려인 뿌리 일깨운 역사적 사건”

입력 | 2020-04-08 03:00:00

[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 / 내 삶 속 동아일보]
<9> ‘창극의 대가’ 손진책 연출가




손진책 연출가(왼쪽)와 부인인 김성녀 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손 연출가는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작품이 된 것처럼 창극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며 “판소리와 창극의 매력을 먼저 알아보고 대중화를 주도한 게 동아일보였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중앙아시아 교민들이 당시 한국 사람을 본다는 건 그야말로 서프라이즈였죠.”

1990년 9월 3일 오후 7시(현지 시간) 소련 모스크바의 소브레멘니크 극장. 수십 년간 소련 전역에 흩어져 살던 고려인 800여 명이 이곳을 찾았다. 고국에서 온 동포들이 준비한 창극 ‘아리랑’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극장에서 2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모스크바행 기차를 탄 교민도 많았다.

막이 오르고 얼마가 지났을까. 무대에 점점 ‘낯익은’ 것들이 나타났다.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듣고 자란 조국의 말이 대사로 흘러나왔고,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는 배우들의 얼굴도 점차 눈에 들어왔다. 하이라이트는 구슬픈 아리랑 곡조가 울려 퍼지던 순간. 배우, 관객이 아리랑을 합창하면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너졌다. 공연장은 탄식 섞인 눈물바다가 됐고 막이 내린 뒤에도 고국 소식에 목마르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우들과 손을 맞잡았다.

이날 공연의 ‘주인공’인 교민들을 한데 아우르는 대규모 ‘아리랑 서프라이즈’를 기획한 사람은 손진책 연출가(73)였다. 최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난 손 연출가는 “남들이 보면 본전도 못 찾는 일이었지만 문화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있어 가능했다”며 “고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은 모스크바를 비롯해 여러 곳을 함께 방문할 만큼 문화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고 회상했다.

40여 년간 냉전의 벽이 문화 교류마저 가로막았던 때, 한국 문화를 소련 땅에 처음으로 선보인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은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였다. 또 이 공연은 1986년 동아일보 지령 2만 호 돌파 기념으로 손 연출가가 창작한 ‘윤봉길 의사’ ‘임꺽정(林巨正)’ ‘전봉준’ ‘홍범도’에 이은 다섯 번째 작품이었다.

손 연출가는 “19세기 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약소민족의 애환을 아리랑의 한(恨)에 담아내 끈질긴 생명력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당시 ‘아리랑’과 ‘세시월령가’(갈라쇼) 공연은 12일 동안 모스크바 타슈켄트 알마티를 비롯한 소련 6개 도시에서 모두 11회 열리며 고려인의 민족의식과 단결을 이끌어 낸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극단 ‘민예극장’ ‘미추’ 대표를 거치며 공연계의 한 축이었던 그에게도 이 공연은 쉽지 않았다. 그는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하지만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공연 사고’에 가까웠다.

“지원을 많이 받은 소품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느라 짐이 많았어요. 모스크바에서 알마티로 넘어가는 비행기는 예상보다 작아 몇몇 단원과 짐을 다 실을 수 없었죠. 공연장에 가니 정작 짐은 오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소리꾼의 ‘목’과 악사의 피리만으로 즉흥공연을 했는데 그것마저도 그렇게 좋아하시던 동포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짐은 공연이 다 끝나고 도착했습니다.”

동아연극상을 비롯해 백상예술대상, 서울연극제 연극상 등을 받으며 국립극단 초대 예술감독을 지낸 그는 “모든 게 동아일보와 공유했던 문화적 사명감 덕분”이라고 했다. 특히 “고 김 회장이 문화애호가이자 문화운동가로 사셨기 때문에 제 쓴소리도 달게 들어주셨다”며 “연출가인 저보다 더 많은 작품을 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며 웃었다. 동아일보가 콩쿠르와 연극상 등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신문사 수입을 생각하면 과거에도 결코 쉽지 않았을 일”이라고 덧붙였다.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