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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잃을 것 없던 청춘들, 상실의 시대에 빠지다

입력 | 2020-03-14 03:00:00

[그때 그 베스트 셀러]1996년 종합베스트셀러 15위(교보문고 기준)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 지음·유유정 옮김/514쪽·1만5000원·문학사상사




1990년대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지 않고 20, 30대를 지나온 청춘이 있을까. 감히 말하건대 당시 상실의 시대는 유행을 넘어 현상이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지 않고는 웬만한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고 소설에 나오는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이 제목은 ‘상실의 시대’의 원제다)과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새롭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왜 그렇게 하루키와 상실의 시대에 열광했던가.

상실의 시대는 연애소설로, 서른일곱 살이 된 ‘나’(와타나베)가 이국의 공항에서 18년 전의 연인 나오코를 소환하면서 시작된다. 소설의 서사는 나오코와 연루된 기억과 또 다른 관계들, 그리고 그 속에서 감당해야 했던 허무와 상처를 복원하는 구조를 따른다. 사랑과 연애, 그리고 청춘의 성장이라는 보편적인 주제에 더해 하루키 소설 특유의 건조하면서도 시적인 문체는 많은 독자의 공감을 견인했다.

소설 전반에 드리워진 어떤 ‘쿨(cool)함’도 인기 요인이었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대학 내 학생운동이나 운동권에 무심할 뿐 아니라 환멸마저 품고 있으며 그가 사랑하는 나오코의 세계는 전 남자친구의 자살이 남긴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상실의 시대 속 인물들에겐 개인의 생활과 고민만 있을 뿐, 역사에 대한 부채감이나 진보를 향한 책임감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이런 산뜻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는지, 이 책이 출간된 때는 1989년(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해)이지만 거대한 붐을 일으키며 하나의 문화현상이 된 것은 1996년(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해)부터였다. 최근에 와서야, 그러니까 지난해 발표된 ‘고양이를 버리다―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말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통해서야 하루키가 역사 속 개인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물에게 집중한 이유를 조심스럽게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이 에세이에는 작가의 아버지가 중일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적인 고백이 담겨 있는데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공포감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루키는 에세이 발표 이전의 한 인터뷰에서 일본의 과거 전쟁에 대한 책임 회피를 비판하기도 했는데 문학이란 결국 공동체의 과오를 끝까지 방관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루키 현상’이 국내 독서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만 끼쳤던 건 아니다. 국내 작가는 엄두도 낼 수 없는 하루키 소설의 높은 선인세(先印稅)는 늘 논란이 됐고 그의 신작이 출간된다면 또다시 논란이 될지 모르겠다. 물론 개별 독자에게 각인된 소설의 장면들은 그런 논란과 별개이긴 하다.

와타나베와 나오코가 한없이 걷던 도쿄 거리 풍경, 기억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연인의 옆얼굴이라는 공통분모, 불구경을 하다가 즉흥적으로 키스하긴 했지만 불명료했던 감정, 그러니까 늘 확신할 수 없었던 우리의 지난 시절 속 어떤 감정들….

조해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