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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상,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 네분과 나누고 싶어”

입력 | 2020-02-11 03:00:00

[‘기생충’ 오스카 역사 바꾸다]시상식장 휘어잡은 봉감독




작품상을 받으러 올라온 봉 감독이 시상자인 배우 제인 폰다(오른쪽에서 두 번째)에게서 오스카상을 받은 뒤 포옹하고 있다. 가운데는 통역 최성재 씨. 게티이미지 코리아

“어렸을 때 제가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그 말을 하신 분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9일(현지 시간)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수상자로 무대에 오른 봉준호 감독(51)은 함께 후보에 오른 거장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각본상, 국제영화상에 이어 감독상까지 거머쥔 봉 감독은 마틴 스코세이지(‘아이리시맨’), 쿠엔틴 타란티노(‘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샘 멘데스(‘1917’), 토드 필립스(‘조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각본상과 국제영화상 수상 때 담담한 표정으로 무대에 올랐던 봉 감독은 감독상 수상자로 호명된 직후 무대에서 연신 머리를 쓸어 올리고 이마를 만지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봉 감독은 영감을 준 거장 감독들에 대한 고마움을 곡진하게 표현하는 한편으로 특유의 재치 있는 입담으로 폭소를 이끌어내고 세련된 매너로 시상식장을 쥐락펴락했다.

봉 감독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보며 공부했던 사람이다. 같이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인데 상을 받을지 정말 몰랐다”고 했다. 두 손을 모으며 감사를 표하던 스코세이지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관객은 모두 기립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감격한 듯한 스코세이지는 무대에 있던 봉 감독에게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었다.

감독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이 객석의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자 스코세이지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봉 감독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유튜브 캡처

봉 감독은 ‘광팬’임을 자처해온 타란티노 감독에 대해 “미국 관객들이 제 영화를 모를 때 항상 제 영화를 리스트에 뽑고 좋아했던 쿠엔틴 형님이 있는데 정말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유명한 스릴러 영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을 인용해 거장들에 대한 존경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도 화제가 됐다. 봉 감독은 감독상을 수상한 뒤 “같이 후보에 오른 토드, 샘도 존경하는 멋진 감독들인데, 오스카 측에서 허락한다면 (트로피를) 텍사스 전기톱으로 잘라 나누고 싶은 심정입니다”라고 하자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후보에 오른 네 감독 모두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했다.

두 번째 오스카 트로피를 들어 올린 국제영화상 수상 후 봉 감독은 “I am ready to drink tonight until next morning(오늘 밤부터 내일 아침까지 술 마실 준비가 돼 있습니다)”이라고 직접 영어로 말해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후 무대 뒤에서 주저앉은 봉 감독이 고개를 들자 배우 최우식(오른쪽)이 촬영하고 있다. 기생충 페이스북 캡처 

감독상 수상을 포함해 네 차례 무대에 오른 봉 감독은 기생충의 수상이 한국 영화와 세계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순간임을 강조했다. 가장 먼저 시상이 진행된 각본상을 수상한 후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사실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이다. 국가를 대표해서 쓰는 건 아닌데, 이 상은 한국이 오스카에서 받은 최초의 상”이라며 101년 한국 영화 역사상 첫 아카데미상임을 강조했다. 봉 감독과 각본을 공동 집필해 무대에 오른 한진원 작가는 “저의 심장인 충무로의 모든 스토리텔러와 필름메이커들과 함께하고 싶다”며 충무로의 이름이 할리우드의 심장에서 울려 퍼지게 했다.

국제영화상을 받은 뒤 봉 감독은 “이 부문 이름이 ‘Foreign’(외국어영화상)에서 ‘International’(국제영화상)로 바뀌었다. 바뀐 첫 번째 상을 받게 돼 더욱 의미가 깊다. 그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 오스카가 추구하는 방향에 지지와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미국과 백인 중심의 시상으로 비판받았던 아카데미 시상식이 ‘자막이라는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을 지지하는 목소리였다.

봉 감독은 각본상 수상 소감에서 “언제나 많은 영감을 주는 아내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정선영 씨다. 1995년 결혼했고 봉 감독의 단편 영화 편집 스태프로도 참여한 적이 있다고 한다. 봉 감독은 최근 미국 잡지 ‘배니티페어’와의 인터뷰에서 “대학 영화동아리에서 영화광인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내 첫 번째 독자로 대본을 완성하고 보여줄 때마다 너무 두려웠다”고 밝혔다. 아들 효민 씨 역시 영화감독으로, YG케이플러스의 웹무비 ‘결혼식’을 연출했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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