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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급 ‘내로남불’[오늘과 내일/김광현]

입력 | 2020-01-16 03:00:00

비정규직, 중소기업 임금차별 깰 직무급
공무원 자신은 안 하면서 민간 권고 모순




김광현 논설위원

천동설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많다. 대학 친구가 은행에서 부장을 끝으로 명예퇴직에 몰렸다. 명예퇴직이란 불명예퇴직의 포장이다.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한창 일할 만하고, 경험과 지식도 충분하다. 그런데 왜 주민등록상 나이로 차례차례 퇴직을 해야 하는가. 부모가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회사를 더 다니게 되는 경우도 많다. 별수 없다고 하지만 공정해 보이지는 않는다. 금융회사는 호봉제 채택 비율이 가장 높은 업종이다.

입사한 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신입사원 2, 3명의 봉급을 받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청년세대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능력이 충분히 있고, 심지어는 봉급을 적게 받을 용의도 있는데, 나이가 찼다는 이유만으로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명예·정년퇴직자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신입사원과 정년퇴직자의 불만을 동시에 줄이는 방안이 입사 순서가 아니라 일의 성격에 따라 임금을 정하는 직무급제가 될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호봉제로 인해 높은 임금을 받는 장기 근속자의 임금을 낮추고 대신 청년 채용을 늘릴 수도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15년 기준 30년 이상 근무한 직원과 1년 미만 근무자의 임금 격차는 평균 3.3배다. 일본의 2.5배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봉제는 여전히 강고하다. 줄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작년 기준으로 종업원 100인 이상 사업체 중 58.7%가 호봉제를 채택하고 있다. 연공서열제가 장점도 많지만 고령화, 저성장 추세에는 맞지 않는다.

며칠 전 고용노동부가 ‘직무 능력 중심 임금체계 확산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근속연수가 높아지면 자동으로 임금이 올라가는 호봉제는 줄이고 대신 직무와 능력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취지이고 방향이다.

임금의 대원칙 가운데 하나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이 원칙에 가장 충실한 제도가 직무급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이란 이유만으로, 하청업체에서 파견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본사 직원보다 월급을 반밖에 못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남녀,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의 임금 차별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제대로 안 지켜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직무급은 국제노동기구(ILO)가 권장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직무급이 호봉제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역시 기득권의 반발 때문이다. 고용부의 방안이 나오자 민노총은 즉각 “정규직의 임금 삭감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역시 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이해관계 앞에선 헌신짝이다.

임금체계 개편은 정부의 올해 노동혁신 과제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정부가 시늉만 하고 의지가 없기는 다른 혁신이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330여 개 공공기관 가운데 직무급을 도입한 곳은 겨우 5개, 그것도 직원 1000명 이상인 제법 큰 공기업은 이달 도입을 발표한 KOTRA가 유일하다. 공무원 임금체계는 말할 것도 없다. 자기도 못 하면서 민간기업에 대해 도입을 권고하니 제대로 말이 먹힐 리가 없다. 관련 컨설팅을 받는다면 지원해 주겠다는 예산이 고작 4억 원이다.

100세 시대에 봉급을 적게 받고도 일을 오래하는 방안이 있다면 기업과 근로자, 사회 모두에 득이 될 수 있다. 공정한 임금체계는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3가지를 모두 합친 것보다 우리 사회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론 공정하고 생산적인 방향이다. 하지만 ‘노동을 존중하는 사회’가 아니라 ‘노조를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 정부가 과연 노조의 반발을 무릅쓰고 제대로 시도나 해볼지는 의문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