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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경제성장 주체… 진입장벽 낮추고 공정한 룰 만들어줘야”

입력 | 2020-01-13 03:00:00

[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
2020 신년 글로벌 석학 인터뷰 <3> 노벨경제학상 폴 로머 교수




《201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 미국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65)가 동아일보와 신년 인터뷰에서 “경제 성장의 동력은 거대 정부 조직이 아닌 아이디어를 가진 신생 기업이며 정부의 우선순위는 이들 신생 기업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최저임금 등 한국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대의와 별개로 수단이 적절했는지 구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경제 성장의 동력은 거대 정부 조직이 아닌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신생 기업입니다. 정부의 우선순위는 이들 신생 기업을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201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 뉴욕대 스턴경영대학원 교수(65)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정부가 직접 개입하기보다는 새로운 기업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고 공정한 경쟁을 촉진시키는 환경을 마련하는 게 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해 3월과 5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유지해야 할 강점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고숙련 노동력을 꼽으며 “양질의 노동력 활용이 여전히 우선순위에 있다”고 밝혔다. 또 최저임금 인상 등 최근 한국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해서는 “양극화 완화라는 목적의 정당성과 별개로 수단이 적절했는지는 구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해 12월 18일 전화로 진행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2020년 세계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나. 미국과 중국이 1단계 무역합의를 했다.

“(양측의 관계가) 무역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술패권, 국가안보, 지식재산권 등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까지는 10년 넘게 걸릴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불확실성은 특히 큰 투자 결정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다만 정확하지 않은 예측보다는 경기 침체가 닥쳤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 집중하는 편이 더 건설적이라고 본다.”

―최근 미국의 통상정책에서 드러난 보호주의적 움직임에 세계 경제의 우려가 크다.


“세계 무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고 있다(2019년 기준 세계 무역에서 미국 비중은 11.1%). 여러 국가들은 상호 무역으로 더 많은 수혜를 볼 수 있다. 각 나라는 미국이 통상 장벽을 높이는 쪽으로 움직인다면 무역 다각화나 내수 증진 등을 계획할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고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경기 하강 우려도 있는데….


“장기적으로 한국은 무역으로 득을 볼 수 있는 나라다. 다만 무역이 침체돼 해외 수요가 떨어진다면 이에 대비해 계획을 세워야 한다. 높은 고용을 유지시킬 내수 계획을 고민해야 한다. 경기부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집, 다리, 도로 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또 적절한 통화정책도 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한국 경제는 급성장을 이뤘지만 앞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잘 교육받은 노동력, 고숙련 노동력이 경제의 성공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일단 한국에서 양질의 노동력 활용은 여전히 우선순위에 있다,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진 여성 인력 활용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다만 이처럼 노동력이 고부가가치 생산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유연하고 경쟁력 있는 시장이 필요하다. 정부가 ‘노동자가 할 수 있는 것’(일자리 만들기) 자체를 고민하는 것은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보단 경쟁력 있는 시장을 조성하는 게 더 현실적이다.”

―여성 노동력 애길 했는데 한국에서는 출산과 육아 때문에 빚어지는 여성의 경력단절이 문제다.

“북유럽 국가들은 좋은 보육 시스템을 여성의 기회를 확장시키는 데 활용했다. 한국에도 교훈을 줄 수 있다고 본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돼’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그건 생산적이지 못하다. 핵심은 계획에 있다.”

로머 교수는 토지, 노동, 자본이라는 전통적인 생산의 3대 요소에 치중하고 기술을 성장의 외생변수로 취급하던 고전경제학과 달리 기술 혁신 및 진보가 성장을 촉진한다는 ‘내생적 성장이론(endogenous growth theory)’을 주창해 현대경제학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기존에 하던 대로 하는 경제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계획을 통해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경제에는 차이가 있다”며 “내 연구의 바탕은 경제가 작동하는 데 있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들을 발견하는(discover) 게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혁신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 주체를 “새로운 기업”으로 봤다. “정부는 이들의 혁신에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로머 교수의 주장이다.

―정부의 규제 때문에 경제 혁신이 늦어진다는 주장도 있는데….


“대다수의 나라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성공한 것은 중앙집권적 정부가 아닌 새로운 기업이었다. 정부의 우선순위는 이들 기업의 새로운 발견과 혁신의 과정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새로운 기업이 진입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신기술이나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할 때 각종 규제를 일정 기간 면제 또는 유예해 주는 제도)를 만들었다. 혁신을 확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례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 다만 정책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정책의 성공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예컨대 스타트업의 진입 속도를 측정하면 정부가 실제로 신생 기업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해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을 비롯한 소득주도성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대의의 성공을 제대로 측정하기 위해선 그 목적과 이를 위한 계획은 구분해야 한다. 정책 목표 자체에는 잘못된 게 없다. 다만 특정 법안을 통과했다고 경제적 결과가 그저 얻어지진 않는다. 가령 다리를 건설하는 법을 통과시켰다고 더 많은 다리가 생긴다고 할 수 없지 않나. 노동의 공급과 수요에 변화를 줘서 노동시장을 통해 해당 계층의 임금이 올라가는 결과를 낳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교육을 통한 인적 자본 투자를 늘 강조해왔다. 한국은 사교육비 지출이 최고 수준이지만 정작 기업에서는 쓸 만한 인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기업이 노동자에게 원하는 기술과 현행 교육제도에서 만들어내는 자질을 비교하면 어떤 변화를 줘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직장에서도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젊은이들이 일단 직장을 얻고 일을 해봐야 한다. 일해 본 경험은 학교에 가는 것만큼 중요하다.”

―취업 가능한 직장이 기대에 못 미칠 때 취업을 유예하는 것은 어떻게 보나.


“젊은 세대가 비현실적 기대를 지니고 당장 가능한 직업을 원치 않는다면 왜 그런 기대를 갖게 됐는지 물어야 한다. 이 같은 불균형이 커지면 경제활동 참여를 포기하는 젊은이가 늘어 사회 문제가 된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준비가 돼 있지 않고 기술을 습득하지 못한다면 경제도 성장하지 못한다.”

로머 교수는 시장 경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시장 만능주의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는 “정부도, 시장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며 조화를 요구했다. 특히 기술 주도 신(新)경제에서 지식재산권과 기술에 대한 인센티브 등에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

―오늘날 정부가 특히 더 중점을 두어야 할 분야는 어디라고 보나.


“당면한 가장 큰 위협은 새로운 기업들의 진입을 가로막는 독과점기업이다. 이들 기업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질 수 없도록 경제 시스템을 보호하는 데에 정부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견제받지 않는 민간 세력은 매우 위험하다. 이런 기업들이 얻을 수 있는 힘에 한계를 확실히 설정해 둘 필요가 있다.”

―구글, 페이스북 등 거대 테크 기업을 염두에 둔 것인가.


“그렇다. 하지만 다른 많은 영역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경제의 목표는 소수의 독점기업이 거대 이윤을 올리는 게 아니라 경제를 구성하는 시민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돼야 한다.”

로머 교수는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로 재직하던 시절 “주류 경제학이 수학에만 매몰된 유사(類似)과학으로 변질됐고 진정한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동료 학자들을 비판하는 등 ‘괴짜’ ‘이단아’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내생적 성장 이론은 지난 30년간 경제학계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터뷰 내내 새로운 발견, 계획 등의 단어를 자주 썼던 그는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하며, 이에 대해 정확하고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계획을 짜는 것이 역사상 경제에 성공을 가져온 핵심이었다”고 거듭 밝혔다. 그는 향후 100년에 대해서도 낙관적 전망을 내놨다.

―2020년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이한다. 경제학자로서 지난 100년을 어떻게 평가하나.


“지난 100년간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많은 진전을 이뤄냈다. 향후 100년의 목표는 훨씬 더 잘하는 것일 테고 마음만 먹으면 금융위기 같은 어려움 없이 이를 이룰 수 있다. 더 높은 야망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다음 100년은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