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월 LG그룹 회장 취임 직후 모습.
1960년대 일어났던 일이다. 구인회 LG 창업주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50%씩 출자해 상업 방송국을 개국했다. 1964년 5월 9일 서울 태평로 안국화재보험빌딩에서 ‘라디오 서울’을 개국했고, 그 해 12월 7일 동양TV까지 만들어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업은 초창기부터 삐걱거렸다. 삼성과 LG 직원들은 서로에 대한 문화차이와 이해 부족으로 사사건건 충돌했다. 당시 구 창업주와 이 창업주는 비슷한 연배에다 사돈지간이었다. 구 창업주는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호암(이 창업주의 호), 양가의 불화설이 장안에 퍼지고 있으니 창피하네. 손해가 큰 TV 방송국만 이쪽에 넘겨주려면 라디오 서울의 청산 차액을 빨리 주게. 만약 자네가 TV 방송국까지 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게. 우리 손자들의 장래를 생각해서일세.”
구 창업주가 냉혹한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인화를 중시하며 과감히 사업까지 포기했던 것은 경영자 수업을 받던 구 명예회장에게 큰 교훈이 됐다. 1970~1995년 동안 LG그룹 회장으로 재임했던 구 명예회장은 인화를 LG의 핵심 철학으로 만들었다.
● 몸으로 깨우친 현장의 중요성
구 명예회장은 1925년 4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를 졸업한 뒤 1946년 진주 지수초교 교사로 첫 직장을 시작했다. 해방 직후의 격동기 속에 미래 일꾼이 될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보람된 일이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던 1950년 5월 “교직을 그만두고 내 일을 도우라”는 부친의 부름을 받았다. LG 사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사람 손 하나가 아쉬울 때여서 구 명예회장은 자신의 꿈을 접었다.
구 창업주는 1960년대 후반 병상에서 운명을 앞두고 투병하던 도중 구 명예회장을 불렀다. “나를 많이 원망했제. 기업을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장이다. 그래서 본사 근무 대신에 공장 일을 모두 맡긴 게다. 그게 밑천이다. 이제 자신 있게 기업을 키워 나가라.”
1969년 12월 부친이 사망하자 구 명예회장은 이듬해 1월 락희금성그룹(현 LG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병상에서 들은 부친의 조언은 결국 유언이 되고 말았다.
● 인화의 다른 말은 ‘합리성’
구 명예회장은 종종 사석에서 ‘피를 나눈 부모형제 사이에도 한 푼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다투는 일이 많은데 사돈지간인 구 씨와 허 씨 집안은 어떻게 평생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구 명예회장은 단호히 대답한다. “합리적으로 일하기 때문이지요.”
창업 당시에는 회사 규모가 작아 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사업을 운영하다보니 자연히 서로 신뢰하며 책임을 다하는 ‘인화’가 실시됐다. 하지만 회사가 점차 커지면서 인화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구 명예회장은 1989년 실시한 그룹 이미지 설문조사에서 변질된 인화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응답 사원 중 57.8%가 ‘LG는 보수적인 회사, 인간적인 회사’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 ‘진취적인 회사’라고 응답한 비율은 1.8%에 그쳤다. 대학 졸업생들도 “조직분위기가 인간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몸이 편한 회사라고 들었다” 등과 같은 이유를 대며 LG를 선택했다.
구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인화는 경영의 본체인 사람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조직 내 ‘인화’를 빙자해 뿌리 깊게 퍼져 있는 무사안일과 비합리적인 풍토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구 명예회장은 틈나는 대로 공장과 지방 현장으로 내려가 종업원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며 합리성과 주인의식을 강조했다.
● 말년은 ‘버섯’과 ‘골프’ 사랑
구 명예회장인 자신이 만 70세가 되던 1995년에 LG그룹 경영권을 장남인 고 구본무에게 물려주고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구 명예회장에 이어 LG그룹을 이끈 아들 구본무 회장은 지난해 5월 별세했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난 뒤 충남 성환 시에서 붙박이 생활을 하면서 버섯 재배에 빠졌다.
1992년 경 ‘국내에 버섯공장은 여럿 있어도 종균(種菌)하는 곳은 없다’는 말을 듣고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렇다할 지식도 없이 달려들었지만 어느 새 개인연구실까지 만들어 버섯연구를 이어갔다. 팽이버섯으로 시작한 연구품종도 만가닥버섯 세송이버섯 등으로 다양해졌다.
골프도 즐겼다. 구 명예회장은 1995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1주일에 한 번씩 대종회 회원이나 퇴직 임원들과 골프를 쳐 왔고 평소 90대 후반 타수를 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11월 경기 광주시 곤지암컨트리클럽에서 84타(12오버파)를 쳐 자신의 나이와 같거나 더 적은 타수를 치는 이른바 ‘에이지 슛(Age Shoot)’을 기록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계에선 구 명예회장이 만 70세에 장남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후 취미생활을 한다는 자체가 한국 재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재벌가 오너의 집안싸움은 상시적으로 있어왔기 때문이다. 구 명예회장의 ‘무욕(無慾) 경영’ 덕분에 그는 한국 재계에서 몇 안 되는 존경 받는 원로로 자리매김 했다.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