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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亞대회 첫 우승 이끈 농구 원로들…“몸싸움 대비해 합기도 훈련까지”

입력 | 2019-12-04 16:35:00


이인표(왼쪽), 김인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11월29일은 한국 농구 역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다. 농구인들도 잘 모르는 날이다. 대부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한다. 농구 인기가 급상승한 요즘 한 번쯤 되돌아볼 가치가 있는 추억의 시간이다.

50년 전인 1969년 이날은 한국 남자 농구가 처음으로 아시아 무대에서 우승을 차지한 날이다.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ABC)대회 풀리그 마지막날 한국은 당시 아시아 최강이었던 필리핀을 꺾고 8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현장에서 라디오 중계가 됐지만 속보나 경기 내용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아서 신문들은 12월1일자 지면으로 일제히 우승 소식을 지면에 알렸다.

이 대회를 생생히 경험했던 농구계 원로들은 첫 아시아 제패라는 의미를 넘어 농구가 처음으로 국내에 보급된 뒤로 60년 가까이 우물안 개구리였던 남자 농구가 한 단계 도약한 변곡점으로 평가한다. 이 대회 우승 분위기를 타고 한국 남자 농구는 이듬해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고, 또 그해 최초로 세계농구선수권대회에 나서 첫 승의 쾌거를 얻었다.

이인표(76) 전 한국농구연맹(KBL) 경기위원장과 김인건(75) 전 KBL 경기본부장은 신동파(75) 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과 함께 1960년대 남자 농구 대표팀을 이끈 주역으로 첫 아시아 대회 우승의 산증인이다. “요즘 프로농구 경기장에 팬들이 많이 찾아주셔서 너무 뿌듯하다”는 두 전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년 전 우승의 감격이 서렸던 태국 방콕의 체육관을 방문하려 했었다. 개인 사정으로 계획을 접었지만 대신 50년 전 추억이 현재 프로농구 인기를 끌어올리는데 ‘스토리텔링’으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싶어 함께 기억을 더듬었다. 내용의 현장감과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대담 그대로를 전한다.

● 필리핀 거친 플레이 대비 합기도, 낙법 훈련까지

▽김인건= 우승한지 딱 50주년이네. 원래 방콕의 체육관을 가려고 했는데, 다들 바빠서 포기를 했어. 그 때 감독이 박상영 선생님이었고, 김영기(전 KBL 총재) 코치, 김영일 주장이 있었지. 김영일씨는 나중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지. 우리들이 제일 위였지. 바로 아래가 신동파, 조승연, 신현수가 있었고.

▽이인표= 하나 밑이 최종규, 박한 이렇게 됐지.

▽김인건=또 그 아래가 서상철, 유희영, 이자영이었어. 그 때 나는 해병대에 있었을 때야. 50주년이 됐는데 멤버들이 보고 싶네. 지금 총무가 유희영인데 3개월 만에라도 한 번씩 봐야겠어.

▽이인표=박 감독 생각이 나네. 1969년 대회 때 방콕 그 더운 날씨에 감독이 직접 물 양동이 들고 다니면서 수건을 적셔 선수들 주고 그랬잖아.

▽김인건=그랬지. 선수는 무거운 것 들면 안 된다고 본인이 매니저 역할까지 했잖아.

▽이인표=필리핀 애들 참 거칠었었어.

▽김인건=몸싸움을 엄청 했었어. 그 때는 심판 두 명이었는데 심판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치고 들어오는 거야.

▽이인표=필리핀 대비한다고 종로 YMCA 체육관에서 태권도, 합기도를 배웠잖아. 운동하다 말고. 하하.

▽김인건=한 달 동안 유도 낙법, 떨어지는 것만 연습했던 게 기억나네. 필리핀하고 마지막 경기할 때 날 막던 선수하고 계속 부딪혔어. 그런데 경기 중에 체육관에 정전이 된 거야. 그 순간 누가 나를 한 번 칠 것 같더라고. 진짜 흰색 유니폼을 입은 필리핀 애가 다가오길래 ‘그래, 한 번 붙자’고 덤볐지. 그러니까 이 친구가 위 유니폼을 벗고 벤치로 도망가더라고. 그 때 불이 들어온 거야. 그걸 본 태국 관중들이 웃고 난리가 났었지.

▽이인표=우리가 세게 덤비니까 나중에는 필리핀 애들이 움찔움찔하면서 도망다니더라고. 필리핀은 우리가 존(지역방어)을 쓰면 정말 꼼짝 못했어.

▽김인건=미국인 코치가 필리핀 경기를 보고 맨투맨만 고집해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한거야. 그래서 매치업존(혼합 수비, 상대의 공격 형태에 따라 맨투맨과 지역방어를 섞는 형태)을 처음으로 시도한 거지.

▽이인표=미 8군에는 대학에서 농구를 제대로 했던 선수들이 많았잖아. 의정부, 동두천, 오산 등을 돌면서 연습 경기를 한 게 도움이 많이 됐어. 공격에서는 자기 수비에 수비 한 명을 더 붙이고 노마크 찬스를 만들어주는 패턴을 많이 연습했지.

▽김인건=대표팀에서 190cm를 넘는 선수가 박한 뿐이었잖아. 상대보다 키가 작으니 조직적인 농구를 할 수밖에 없었지. 김영일이 센터로 스크린 플레이를 기가 막히게 해서 이인표나 신동파 슛 기회가 많이 났지. 신동파가 수비를 잘 안하는데, 하하. 김영일은 본인이 두 자릿수 득점은 못하지만 수비 다 도와주고 도움도 많이 했어.

▽이인표=필리핀 경기 때 신동파가 50점이나 넣었어. 하하.

1969년 농구대표팀과 박정희 전 대통령


● 선진 농구를 이식한 최초의 외국인 대표팀 코치 둘

▽ 김인건=1969년에 방콕 ABC대회 우승하고 바로 1970년 방콕에서 아시안게임 금메달 딴 건 지금까지도 대단한 기록인데, 정말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이 과정에 미국인 코치들의 역할이 컸다는 거야.

▽ 이인표=1966년부터 1968년 멕시코 올림픽까지 3년을 미국인 코치 두 명이 지도를 했지. 한국 농구가 성장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야. 연속적으로 대한농구협회에서 정식으로 임명한 외국인 코치가 대표팀을 맡아 지도한 효과가 컸어.

▽김인건=주한 미군이었지. 마크 혼이 1년을 하고, 그 뒤로 가스 폴이라는 코치가 2년을 맡았어. 마크 혼은 우리 또래였지? 스테픈 커리(골든스테이트)가 나온 데이비슨 대학에서 농구를 했었어. 가스 폴은 독일계 미국인인데 얼마 전에도 한국에 왔었어. 정말 그 두 사람이 대표팀을 맡으면서 미국의 농구 기본기를 익혔지. 스위치(수비자끼리 수비 상대를 바꾸는 동작) 같은 것을 처음 배웠잖아.

▽이인표=딱 두 시간만 훈련을 하는데, 진을 빼놓잖아.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훈련 시간이야.

▽김인건=3년 동안 지겹게 패스트 브레이크(속공) 연습을 많이 한 기억이 나네. 미국 대학 농구를 그대로 배운 거지. 얼마나 재밌게 농구를 했어. 이게 1969년의 열매를 맺은 거야. 다음 해에 아시안게임도 금메달을 따고. 그 때 3년이 한국 남자 농구의 토대가 됐다고 봐야지.

● 상상도 못했던 미국 전지 훈련

▽이인표=미국 전지 훈련도 얘기를 해야지. 정말 1960년대에 미국으로 전지 훈련을 간다는 게 상상이 돼?

▽김인건=용산에 가면 그 당시 트랜드 짐이라고 체육관이 있었는데 대표팀이 거기서 연습을 많이 했지. 마크 혼 코치가 있었을 때는. 그러다 1968년 1월이지,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이 났을 때야. 기스 폴 코치가 마련한거지. 밴쿠버, 샌디에이고,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LA, 하와이를 거쳐 귀국했는데 한 달 넘게 전지 훈련을 했어. 아마 이 얘기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야. 경기를 18번 정도 했어.

▽이인표=멤버 절반은 일본에서 밤에 군용기를 타고 갔잖아. 나머지는 월남에서 들어오는 여객기로 가고.

▽김인건=우리는 여객기를 타고 갔잖아. 군용기에선 음식 서비스할 사람도 없어서 힘들었다고 들었어.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렸고, 군용기에 탄 멤버들은 시애틀에서 내렸잖아. 바로 다음 날 밴쿠베에서 경기가 있어서 부랴부랴 우리는 시애틀 비행기를 타고 합류해서 어렵게 밴쿠버로 갔지. 다들 피곤해서 대학 팀(브리티시 콜롬비아 인 밴쿠버로 기억)하고 아마 3번 다 졌지? 경기를 뛰는데도 하품이 나더라고. 하하.

▽이인표=샌프란시스코에서 경기할 때는 군인 숙소에서 잠을 자서 새벽 4시에 기상해 밥을 먹었잖아. 그런데 돈이 넉넉하지 않으니 가스 폴 코치가 될 수 있으면 아침밥을 안 먹이려고 깨우질 않더라. 하하. 아점을 먹었지. 밴쿠버에서는 교수들 집으로 가서 홈스테이를 했던 기억이 나네.

▽김인건=어느 대학하고 경기할 땐 입장식도 하고 아주 폼나게 뛰었지?

▽이인표=경기 전에 가스 폴 코치가 한국말로 그러는거야. ‘사람 많아, 돈 많아’라고. 대학하고 조율을 해서 입장 수익의 반을 받는다고 들었어. 그런데 경기장에 2000명이나 들어오니까 기분이 좋은 거야. 내일을 맛있는 거 먹을 수 있다고. 하여튼 미국에서 잘 먹었어.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잡고 먹었잖아.

▽김인건=그 박스에 싸여진 소프트아이스크림, 입에서 살살 녹았지.

▽이인표=유희영이 미국에서 살쪘잖아.

▽김인건=미국 다녀오고 10kg 이상 쪘었어. 유희영 별명이 원래 ‘와르바시(젓가락의 일본말)’였잖아. 하하. 미국 다녀오고 몸싸움도 좋아지고 했어.

▽이인표=전지훈련에서 그래도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 풀 코트 압박 수비 연습을 얼마나 시켰는지 몰라.

▽김인건=풀 코트 뿐 아니라 존 프레스(지역방어 형태의 압박수비), 4분의 3프레스 같은 수비 훈련을 무지하게 했지. 공을 가진 상대를 가급적 사이드라인으로 몰던가, 순간 더블 팀을 한다던가 식의 2차 수비 연습도 많이 했어. 그러면서 런 앤 점프(수비자가 자기가 맡은 상대를 놔두고 기습적으로 볼을 가진 선수에게 도움 수비를 들어가 지연시킨 뒤 다시 제자리로 오는 동작) 수비를 자신있게 할 수 있게 된거야. 나중에 1970년 처음으로 세계선수권에 나가서도 잘 써 먹었지.

▽이인표=당시에는 수교도 안 된 유고에서 세계대회를 했어. 그 때 대표팀 단장이 중앙정보부에서 나왔는데, 여권이 2~3개 되더라.

▽김인건=정말 감격스러워. 잘했지. 예선 같은 조가 4팀인데, 캐나다를 이기고, 브라질은 거의 이겼는데 마지막에 심판 휘슬 때문에 졌지. 한국이 결승리그에 올라가면 대회 흥행이 안 된다고 그랬잖아. 현장에서. 마지막에 이탈리아는 상대가 너무 분석을 하고 나와서 크게 졌지.

1970년 5월 유고에서 벌어진 제6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은 예선에서 캐나다를 꺾었지만 브라질과 이탈리아에 패해 8~13위가 겨루는 순위결정전으로 밀려났다. 결정전에서 한국은 파나마, 쿠바에 패했지만 캐나다를 다시 꺾고, 이집트와 호주에 승리하면서 최종 10위로 대회를 마쳤다.

▽이인표=1962년부터 함께 국가대표로 뛰면서 뿌듯한 일들이 많네. 나중에 지도자 생활할 때 밑바탕이 됐어. 농구 인기가 요즘 다시 살아나서 기뻐.

▽김인건=우리가 도움이 될만한 것을 찾아봐야지. 자주 만나서 경기장에도 자주 가자고.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 이인표 ::
1943년 서울 출생
성동공고-건국대-한국산업은행
남자 국가대표(1962~1971)
남자 국가대표 코치(1973)
남자 국가대표 감독(1994~1995)
삼성전자 농구단 단장(1990~1997)
삼성 썬더스 프로농구단 단장(1997~1999)
한국농구연맹(KBL) 이사(1997~2004)
코리아텐더 프로농구단 초대 단장(1999~2001)
KBL 경기위원장(2001~2004)

:: 김인건 ::
1944년 서울 출생
경복고-연세대-해병대-한국은행
남자 국가대표(1962~1971)
실업 삼성전자 농구단 감독(1977~1996)
남자 국가대표 감독(1981, 1986~1987, 1990~1993)
진로농구단 단장(1996~1997)
SBS프로농구단 감독(1999~2002)
태릉선수촌장(2002~2005, 2008~2010)
대한농구협회 부회장(2005~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