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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31일 취임한 이낙연 국무총리(67)가 28일로 19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최장수 총리가 된다. 881일째다. 이명박 정부의 김황식 전 총리 기록(2010년 10월 1일~2013년 2월 25일 재직)을 깨는 것이다.
언론인 출신 첫 총리인 이 총리는 4선 국회의원과 전남지사를 하면서 줄곧 민주당 계열에 있었지만 친문 계보가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천거로 정치권에 입문한 뒤 잠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변인을 했으나 2003년 친노 그룹이 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만들 때도 합류하지 않았다. 그 후에는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오히려 가까웠다. 그런 그가 어느 정권보다 정파색과 진영 논리가 강한 문재인 정부에서 어떻게 최장수 총리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었을까.
● 디테일하고 안정감있는 언어, 이낙연의 ‘절대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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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 총리 취임 후 몇 달까지만 해도 총리실에서 각 부처에 자료를 요구하면 “청와대에 직보하겠다”는 반응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 총리 취임 초기에는 ‘스텔스 총리’ ‘대독 총리’가 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다 얼마 후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의 대처가 필요한 대형 사건사고가 터진 게 계기가 됐다. 2017년 8월 류영진 식약처장이 계란 파동, 생리대 파동 등에 대응을 제대로 못한 게 대표적이다. 이 총리는 의원 시절부터 제대로 보고하지 못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류 청장이 보고를 제대로 못하자 “관리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보다 설명의 의무를 적절히 못 했다는 것이 더 많은 질책을 받고 있다”고 면박을 줬다. 이 총리는 “공직자는 4대 의무(국방, 근로, 교육, 납세) 외의 ‘설명의 의무’가 있으며, 이를 충실히 못하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2017년 8월, 차관급 인사 임명장 수여식에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총리가 특유의 디테일로 정부 내에서 군기반장 노릇을 하자 공직 사회에서 “총리에게 보고하러 가는 게 무섭다”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총리실 관계자는 “국민들은 공무원들이 깨지는 걸 좋아한다. 그만큼 공무원들의 서비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라며 “총리가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나 간담회를 열기만 해도 변화의 징후들이 보인다”고 전했다.
이 총리가 대중적 이목을 끌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17년 국회 대정부질문이다. 야당 의원들이 총리와 장관들을 불러 혼쭐내고 정부 측에서는 “시정하겠습니다”라며 상황을 정리하는 게 통상적 국회 대정부질문의 풍경. 그러나 이 총리는 정부 회의에서처럼 야당 의원 질의를 격식있는 언어로 하나하나 깨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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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님이 한국 대통령보다 일본 총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이 총리)
그 때부터 이 총리가 국회 답변에 나설 때마다 촌철살인 화법을 모은 유투브 동영상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전 총리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정치적 팬덤’이었다.
이렇게 이 총리가 문재인 정부의 실세 총리를 거쳐 최장수 총리 기록을 깨게 된 강력한 무기는 바로 그의 디테일하면서도 안정감있는 언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신문 기자로 20년 간 글을 닦아 온 이 총리는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언어를 자신의 장기로 삼았다. 초선 시절 아무 인연없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변인으로 그의 취임사까지 쓸 수 있었던 것도 쉬우면서도 격식있는 이낙연식 정치 언어 덕이었다.
이 총리의 언어는 정치적 무기를 넘어, 어느 덧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이 됐다. 특히 저음에 실려가는 안정감있는 언어는 소득주도정상이나 남북관계 운전석론 등 문재인 정부의 진보정책 드라이브에 불안감을 느끼는 유권자들에게 강력한 ‘보정 효과’를 준 게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주요 인사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안정감을 언어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 이 총리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 주자로 1위를 놓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안정감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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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리 이후 ‘달라진 이낙연’ 보여줄 수 있을까
2017년 5월 10일, 오후 2시 45분 경, 청와대 춘추관 뒤편 대기실. 몇 시간 전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서훈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등과 인사 발표 기자회견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오전 전남지사 공관에서 갑작스럽게 상경한 이 총리가 문 대통령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를….”
왜 현재 전남지사인 자신을 총리로 발탁했냐는 물음이다. 문 대통령은 웃으며 “제가 예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라고 답했다.
문 대통령이 집권하면 초대 총리로 이 총리를 발탁하겠다고 마음을 굳힌 건 2016년 5월경이었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으로 대선을 1년 7개월 앞둔 시점. 문 대통령은 당시 전남지사였던 이 총리에게 “나중에 이 지사와 꼭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는 메시지는 전한다. 그 때만 해도 이 총리는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여겼다고 한다.
이 총리가 최장수 총리 기록을 깬 것은 무엇보다 임면권자인 문 대통령의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삶의 궤적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지금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고 한다. 한 친문 인사는 “말과 행동의 신중함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과 이 총리가 닮은 면이 많다”고 전했다. 지금도 문 대통령은 참모들이 작성한 발언 초고를 직접 읽고, 빨간 펜으로 고친다. 이 총리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호흡은 국무회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국무회의에서 법령 개정 등이 논의되기 전 해당 부처 장관이 개정 취지 등을 설명하는데, 아무래도 공무원들이 써준 원고대로 읽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면 이 총리가 나서 ‘이 법안의 개정 이유는 무엇이고, 개정되면 일반 국민이 체감하기에 이런 점이 달라진다’며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문 대통령이 이 총리의 설명을 좋아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 총리가 2인자로서의 처신법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의중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몇 차례의 개각 국면에서 이 총리는 문 대통령이 고려했던 인사에 반대 의견을 밝히기도 했고, 본인이 원하는 인사를 추천하기도 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일했던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표적이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 중 하나는 이 총리의 다음 역할이다. 내년 4월 총선 전에는 당에 돌아갈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다.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에서는 이 총리 역할론이 커지고 있다. 지지율이 떨어진 당 입장에서 이 총리가 내년 4월 총선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총리가 늦어도 연말에는 당내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총리 측근들도 이 총리가 가급적 연내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에서 내년 선거를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대선 지지율 1위라는 간판으로 선거에 기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총리는 현역 의원 중에는 이개호 오영훈 의원 등과 가깝고 이 총리와 함께 내각에서 호흡을 맞춘 의원 출신 장관들 사이에서도 이 총리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일각에선 총리직을 내려놓고 당에 복귀하는 순간 현재 1위를 달리는 대선 지지율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총리라는 견장을 떼고 정치권에 복귀하는 순간부터 당의 대주주인 친문 진영의 견제를 받을 수도 있고, 정치 경력에 비해 자기 세력이 없는 이 총리가 지금처럼 대선 주자 위치를 유지할 지도 의문이라는 것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이 총리가 당으로 돌아가는 건 기정사실이다. 문제는 ‘정치인 이낙연’이 총리 이전과 이후로 얼마나 달라졌는지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디테일하고 안정감있는 언어를 갖춘 국정 2인자 그 이상의 정치력을 보여줘야 승부를 걸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