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 도시재생과 맞물리며 카페, 갤러리, 쇼룸으로 다채롭게 활용
실내를 오픈형으로 꾸민 대구 중구 동성로 ‘문화장’. ‘행화탕’의 인기 메뉴인 ‘반신욕라떼(오른쪽)’와 ‘행화에이드’. [사진 제공 · 문화장, 지호영 기자]
기자의 어릴 적 기억 중 따스한 추억 한 자락을 차지하는 건 엄마 손을 잡고 매주 가던 목욕탕이다. 목욕탕에 가면 같은 반 친구를 만날 수 있었고, 함께 커다란 욕탕에서 첨벙첨벙 물놀이하는 재미가 있었다. 목욕 후 마시는 바나나우유와 요구르트는 또 얼마나 꿀맛이던가. 가끔씩 온 가족이 때를 민 날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국집에 들러 짜장면 파티를 열었다. 추억의 장소인 대중목욕탕이 2000년대 이후 쇠퇴기를 맞으며 찾기 힘들어졌다. 으리으리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사우나와 고급 스파, 찜질방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영영 사라질 듯한 대중목욕탕이 가끔 그립고 아쉽기도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목욕탕 공간이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리모델링을 거쳐 카페, 갤러리, 쇼룸으로 다양하게 활용되며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올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 ‘뉴트로’(New-tro·New+Retro·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 트렌드가 인기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공연기획자이자 목욕탕을 개조한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의 서상혁 대표는 “목욕탕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중장년층에게는 과거 따뜻한 시간을 되살려주고, 젊은 세대에게는 색다른 ‘갬성’을 주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술적 감성 가득한 복합공간
서울 마포구 ‘행화탕’에 장식된 목욕탕 관련 소품(위)과 빈티지한 매력이 돋보이는 외관. [지호영 기자]
전시와 공연 등이 열리는 ‘행화탕’의 공간(왼쪽). 평상 콘셉트의 아날로그 감성으로 꾸민 ‘행화탕’. [사진 제공 · 행화탕, 지호영 기자]
먼저 예술문화 전문가들은 오래된 목욕탕을 공간재생의 기회로 삼았다. 그들의 손을 거쳐 차를 마시거나 다채로운 공연과 전시를 관람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 많다. 서울 마포구의 ‘행화탕’과 대구 중구 동성로의 ‘문화장’이 대표적이다. 1958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중목욕탕 ‘행화탕’은 아현동 지역민의 사랑방이었다. 2008년 폐업 후 유휴공간으로 방치되다 2016년 문화예술콘텐츠랩 ‘축제행성’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변신시켰다. 서상혁 대표는 “행화탕의 모토는 ‘예술로 목욕합니다’인데, 몸의 때를 미는 과거 목욕탕에서 마음의 때를 미는 예술공간으로 콘셉트를 전환한 것”이라고 전했다. 커피와 음료를 파는 카페와 공연·전시를 즐길 수 있는 갤러리 공간으로 꾸며졌다. 곳곳에 장식된 때수건, 수건에 인쇄된 메뉴판, 사물함 열쇠 등 목욕탕과 관련된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 평상 콘셉트의 아날로그 감성으로 꾸민 카페가 특히 인기다. 과거 사랑방 역할을 했던 목욕탕의 의미가 재현된 공간이다. 신발을 벗고 좌식으로 앉아 있으면 아무래도 옆 사람과 부딪치거나 신경 쓰이게 마련. 그 과정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자연스레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김모(40·여) 씨는 회사가 근처라 이곳을 종종 찾는다. 그는 “카페에 앉아 있으면 추억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며 “음료 중 ‘반신욕라떼’는 사람 모양의 생크림이 반신욕을 하듯 음료에 빠져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고 전했다. ‘행화’를 뜻하는 살구꽃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살구청이 든 ‘행화에이드’도 시그니처 메뉴다.
예술적 감성이 풍기는 ‘문화장’ 외관. [사진 제공 · 문화장]
목욕탕 구조물을 최대한 살린 ‘문화장’의 아틀리에(왼쪽). 아티스틱한 분위기의 ‘문화장’. [사진 제공 · 문화장]
목욕탕 공간을 리모델링한 제주 제주시 ‘산지천 갤러리’의 코워킹스페이스(왼쪽). ‘산지천 갤러리’의 목욕탕 굴뚝. [사진 제공 · 산지천 갤러리]
‘중앙탕’을 개조한 서울 종로구 계동 ‘젠틀몬스터’ 쇼룸. [사진 제공 · 젠틀몬스터]
목욕탕 공간과 전시된 안경의 조화가 멋스러운 ‘젠틀몬스터’ 쇼룸. [사진 제공 · 젠틀몬스터]
과거 목욕탕의 특색을 최대한 살린 인테리어
목욕탕을 리모델링한 공간들은 인테리어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목욕탕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려 노력한다. 목욕탕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추억이 묻어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과거의 따스한 감성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김선아 한국건축가협회 도시재생위원장 겸 ㈜SAK건축사사무소 대표는 “도시재생 과정에서 동네 유휴지를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일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목욕탕은 다른 익명적 공간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목욕탕이 커뮤니티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에 큰 의미를 뒀다. “목욕탕은 동네 사람들에게 기억의 장소이기에 그 공간의 변신은 기억의 연속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행화탕은 이름부터 과거 목욕탕 이름을 고수했다. 하지만 옥색 위주의 실내가 다소 칙칙하고 음침한 느낌을 줬다. ‘때를 벗기고 기존 속살을 드러내자’는 목표 아래 벽의 옥색을 벗기고 원래 벽돌을 그대로 드러냈다. 덕분에 한결 환하고 밝으며 따뜻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도시재생과 어우러져 활성화 기대
노후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목욕탕 재생’은 환경 친화라는 측면에서도 환영받고 있다. 전남 순천시 도시재생지원센터장을 역임했던 이동희 순천대 건축학부 교수는 “건축은 인간과 공간의 관계 맺음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변용되는 것”이라며 “그 흐름에 따라 낡은 목욕탕이 문화공간 등으로 쓰임이 바뀌면서 건축물의 생명이 연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 건축 재료의 3요소는 유리, 철, 시멘트다. 이를 중심으로 지은 건축물은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구 환경을 위협하는 쓰레기가 되기 쉽다. 요즘 세계적으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확산되는 추세다. 건축뿐 아니라 패션과 뷰티 등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쳐 환경 친화적인 제품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도시에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을 부수지 않고 재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 교수 역시 “오래된 목욕탕처럼 구조적으로 문제없는 나이 든 건축물을 재생하는 ‘리노베이션’ 트렌드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현숙 기자 life77@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10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