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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의 경기를 치료한 유모의 젖[이상곤의 실록한의학]〈81〉

입력 | 2019-09-16 03:00:00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왕위에 오른 지 14년 만에 장희빈에게 얻은 세자 윤(훗날 경종)은 숙종에게 금지옥엽이었다. 숙종 재위 15년 11월 첫돌을 넘긴 세자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지자 궐에 난리가 났다. 숙종은 어의와 제조들을 불러 경기를 멈출 방안을 물었다. “세자 처소가 너무 더워서” “유모가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 열이 많아서” “생면부지 유모를 보고 놀라서” 등 원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됐다. 하지만 “경기는 열 살 전후에 없어진다”는 긍정론이 대세를 이루면서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경종의 어릴 적 경기는 간질로 발전해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결국 그는 간질 치료를 위해 반복해 먹은 약물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간질의 근본 원인인 심화(心火·열)를 내리기 위해 먹은 찬 성질의 약들과 이로 인해 생긴 설사가 문제였다. 찬 약과 설사약의 반복된 복용은 경종의 위장 기능을 떨어뜨리고 밥맛을 잃게 했다. 경종은 입맛을 되돌리기 위해 성질이 찬 게장과 생감을 과식했고 그로 인해 유명을 달리했다. 이는 경종에 대한 ‘영조 독살설’의 단초가 됐다.

어린 세자의 경기 증상이 계속되자 제조 목내선은 민간처방을 소개한다. 바로 백회혈에 대한 뜸과 ‘백구(하얀 개)의 개똥즙(白狗糞汁)’ 복용이었다. 그는 “백회혈의 뜸은 어린 세자가 감당하기 힘들고 개똥은 불결해 복용이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내가 직접 복용해 열을 내리는 데 도움을 받았다”며 권했다. 이즈음 제조들 사이에 세자에게 우황포룡환, 용뇌안신환 등 열을 내리는 약물을 써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하지만 첫돌을 막 넘긴 세자에게 적극적인 침뜸 치료나 직접적인 약물 처방은 불가능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제조들이 특별한 약물 복용 방법으로 제안한 것이 ‘유도(乳道)’였다. 유도를 직역하면 ‘수유의 법도’로 해석되지만 한의학에선 약 성분을 유모의 젖을 통해 아이에게 간접 전달하는 치료법을 말한다. 유모가 독한 약을 먹으면 그 성분이 젖을 통해 중화돼 아이에게 전달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실제 유도는 함부로 약을 쓰기 어려운 유아들을 위한 치료법으로 활용돼 왔다. 동의보감은 ‘유즙에는 열을 내리고 보하는 효능이 있어 열이 날 때 젖을 먹이는 것만으로도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다.

숙종은 경기의 원인을 유모의 잘못된 음식 섭생에서 찾았지만 동의보감은 임신 시 산모의 심리적 상태를 더 중요시한다. 조선시대 왕비들의 임신에 대한 압박감은 엄청났다. 실제 숙종부터 정조에 이르기까지 왕비가 왕자를 출산한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문종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비는 왕자를 한 명 이상 낳지 못했다. 조선 후기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기까지 암투를 벌였던 장희빈은 또 얼마나 많은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까. 몸이 마음의 가장 정확한 척도라면 장희빈이 경종 임신 시의 환희보다는 불안과 공포가 얼마나 크게 내재해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미 그 순간부터 경종의 간질은 잉태되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