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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대사 패러디한 CF 잇단 대박… “사딸라 아저씨다!” 초등생도 졸졸

입력 | 2019-03-30 03:00:00

광고계 블루칩으로 ‘제2 전성기’ 배우 김영철




과거 안방극장을 사로잡았던 명품 연기를 패러디한 광고가 연이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김영철. 그는 하루를 “감사하다”로 시작해서 “감사하다”로 끝내는 마음으로 보낸다고 했다. 허브넷 제공

《사람이 180도 달라 보이기도 쉽지 않다. 외모가 바뀌거나 또는 뭔가 인생에 큰 변화가 있지 않다면…. 배우는 더 그럴까. 시대를 넘어 회자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연기를 했다면, 그것 때문에라도 각인된 이미지를 깨기 힘들다.

요즘 세대를 넘나들며 화제가 되는 배우 김영철 씨(66)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는 20년 전 안방의 화제가 됐던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방송사 연기대상까지 받았다. 그 뒤로는 뭘 해도 사람들 눈에 궁예의 이미지만 보였다. 게다가 ‘야인시대’의 김두한, ‘아이리스’의 백산 국장 등 궁예와 비슷한 ‘보스’ 역할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 그가 최근 달라 보인다. 그의 극 중 명대사들이 광고로 연이어 패러디되면서 ‘친근하고 핫한 아저씨’가 됐다. 전성기 작품을 알 리 없는 초딩(초등학생)들에게는 햄버거 광고에 등장하는 ‘사딸라(4달러) 아저씨’다. 김두한 역할로 미군과 협상을 벌이는 장면에서 나온 “사딸라”라는 대사는 뒤늦게 국민적 유행어가 됐다. 다시 각광받는 그를 22일 만났다.》

―광고계의 ‘블루칩’이 됐다.

“처음 느끼는 전성기인 것 같다. 예전에 길거리에서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눈을 못 맞추고 고개를 숙이면서 ‘궁예다’ 했다. 지금은 ‘사딸라, 사딸라’라며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실존했던 인물이 희화화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역사 속 인물을 제대로 봐주면 좋겠다. 희비가 교차하는 삶이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김영철 전성시대’다. 광고는 물론 드라마 케이블TV에서는 ‘태조 왕건’과 ‘야인시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재방송되고 있다.

드라마 ‘야인시대’의 대사를 패러디한 햄버거 광고. 이 광고 때문에 김영철 씨는 학생들 사이에서 “사딸라 아저씨”로 통한다.

“쑥스럽다. 왜 연기를 저렇게 했을까 생각도 든다. 20년 가까이 지났는데 좋게 봐주시는 시청자들이 많아 감사하다. 고생한 다른 배우들, 제작 스태프도 많은데 나만 특혜를 받는 것 같아 미안하다.”

‘사딸라’ 말고도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라는 대사 역시 화제다. ‘태조 왕건’에서 궁예가 ‘관심법’으로 신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던 중에 신하 한 명이 기침을 하자 역정을 내며 한 대사다. 결국 그 신하를 죽여 결국 폐주(廢主)로 가는 면모를 드러낸 명장면이다. 한 아이스크림 광고에서 패러디돼 재조명된 데 이어 7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인기 만화 유튜버의 패러디로 또 한 번 히트를 쳤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는 ‘김영철’이 이 대사로 감기약 CF를 찍게 될지 재밌는 설전이 오가고 있다. 그는 “재밌게 패러디되고 있지만 극 중에선 궁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시발점이 되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변화무쌍한 연기였다. 궁예 연구를 많이 했나.

“역사적으로 기록 자료 10줄 정도만 남아 있다. 배우들은 상상력을 통해 인물을 조각내서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런 능력이 정점이었을 때 그 인물을 맡았던 것 같다. 아내가 평소에도 너무 왕 같다고 할 정도로 궁예에 ‘빙의’된 것 같았다. 궁예를 가장 오래, 가장 깊이 연구했다는 이재범 교수(경기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신문 인터뷰에서 역사의 궁예보다 더 궁예같이 연기를 했다고 평가하신 걸 봤다. 저를 향한 가장 의미 있는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말대로 국내 대하드라마 역사에서 으뜸으로 꼽을 만한 궁예 연기를 펼쳤지만 연기 인생에서 마이너스가 된 부분도 분명히 있다. 태조 왕건 이후 2년 만인 2003년 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 역으로 복귀했지만 이미지와 연기의 카리스마가 궁예와 겹친다는 냉정한 평가도 있었다.

―고민이 컸을 텐데….

“배우 율 브리너(1920∼1985)도 영화 ‘왕과 나’에서 돋보이는 연기를 하고 나서 더 큰 역할을 못했다. 강렬한 연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배역마다 맛을 살리려 했다. 김두한의 ‘사딸라’ 대사는 통 크게 고집을 부려 관철시키는 맛이 있었다. ‘아이리스’의 백산 국장은 정보기관의 수장답게 냉철하면서도 여린 면모가 보이는 사람이었다. 궁예는 다소 무모하지만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연기의 차원이 달랐던 것 같다. 나중에 아버지 역할을 자주 하면서 궁예의 이미지를 조금 벗은 것 같다. ‘사딸라’ 햄버거 광고를 찍은 것이나 얼마 전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도 궁예를 조금 더 지워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것이다.”

김영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이병헌이다. 드라마 ‘아이리스’, 영화 ‘달콤한 인생’ 등 여러 명작을 함께했다. 최근에는 게임 광고도 같이 찍었다. ‘달콤한 인생’에서 조직의 보스로 나온 장면을 재현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다.

―이병헌 씨는 연기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파트너’가 아닐까.

“병헌이와 연기를 하면 깊이가 달라진다. 서로 대사를 주고 받다 보면 저절로 배려, 양보, 믿음이 생겨 ‘연기는 이렇다’는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병헌이의 형으로 나온 드라마 ‘바람의 아들’에서 내가 병헌이 무릎 위에서 죽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죽어야 되는데, 나를 붙잡고 오열하는 병헌이가 연기를 너무 잘해서 눈물이 나더라. 친한 고교 친구의 조카인데 6년 전 방송연기자협회 회장을 할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삼촌 친구라면서. 너무 고마운 후배다.”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로 사람 냄새가 나는 전국의 동네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너무 나 위주로 살아온 것에 대해 반성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 얼마 전 성수동을 갔는데, 전북 고창에서 42세에 서울로 올라 오셔서 40년 동안 가게에서 더덕을 파시는 할머니를 만났다. 얼마 수입도 안 될 텐데 팔리는 대로 매일 주변 갈 곳 없는 할머니 20명에게 밥을 해주시더라. 당신 자신의 작은 마음을 나눠준다는 것이 너무 짠했다. 요즘 후배 배우들한테 ‘연기 못해도 주변 사람들하고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다시 깨닫게 됐다.”

―수준 높은 드라마, 자연스럽고 감동적인 연기를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의 갈증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공짜는 없다. 얼마만큼 노력하고 쏟느냐, 이것은 인성과도 연결돼 있다. 연기를 더 잘하기 위해선 절제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스스로 주문해야 한다. 1973년에 연기를 시작하면서 대사 없는 웨이터, 인력거 기사 같은 단역을 오래 해봤다. 그러면서 작품에 대한 이해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기 전공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만의 ‘커리큘럼’을 구축할 수 있었다. 나만의 ‘연기 은행’에서 역할에 대한 정보를 뽑아 쓰고 다시 채워놓기를 반복해왔다. 앞으로도 은행에 잔액이 부족하면 또 공부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보고 싶나.

“꿈꾸는 건 꼭 이뤄지더라. 언젠가 연세가 100세이신 김형석 명예교수(연세대)께서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까지가 우리 인생의 절정이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항상 뭔가 하려면 늦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분 이야기를 듣고 자신감을 얻었다. 다양한 아버지를 해보고 싶다. 로맨스가 있는 아버지, 혼자 사는 슬픈 아버지 등등 이 시대 모든 아버지의 삶을 연기해보고 싶다.”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