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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교육 받은 청년들이 ‘담양 만세운동’ 주도했다

입력 | 2019-04-01 03:00:00

[3·1운동 100주년 현장/창간 99주년]
3·1운동 기획한 고하 송진우 선생 일제에 주도 인물로 분류돼 체포
동아일보에 일장기 지운 사진 게재



담양군은 3월 1일 죽녹원 앞에서 담양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열고 그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담양군 제공


전남 담양에서는 근대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인근인 담양에도 전해졌다. 담양읍 천변리에 사는 정기환은 광주에 다녀오면서 만세시위를 보고 크게 자각했다. 그는 평소 절친한 사이였던 국한종 정경인 임민호 등을 불러 광주에서 남녀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수많은 민중과 호응하며 만세를 부른 감격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우리들도 방관할 일이 아니므로 서둘러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라고 하자 국한종 등은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시위 방법과 날짜 등을 협의하고 동지를 모았다.

이들은 3월 18일 담양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양각산에 숨어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했다. 임기정은 담양보통학교 3∼4학년생인 김홍섭 김길호와 연락해 각자 동급생들을 동원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했다.

3월 17일 임기정 등은 조선인을 학, 일본인을 황새에 빗대 ‘황새가 날아와 학의 둥지를 빼앗아 1700여 학이 비탄에 젖어 있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했다. 또 하늘이 이러한 상황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며 황새를 쫓아낼 시기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격문 끝부분에는 붉은 물감으로 ‘금일 시장에서 호만세(呼萬歲)’라는 글귀를 써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이날 김길호 김흥섭은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18일 오후 2시를 기해 장터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부를 계획이니 전원 장터로 모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이들은 18일 새벽 격문과 태극기를 시장통 사거리 다리 밑에 숨기는 등 시위를 착실히 준비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일본 헌병분견대에 발각돼 의도대로 전개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정기환 등 애국청년과 학생들은 시장으로 뛰쳐나가 수백 명의 민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했다. 체포된 주동자 중 정기환 임기정은 각각 징역 2년, 국한종 정경인 임민호 등은 각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3월 20일 담양군내 각 동리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됐고 4월 1일에는 월산면 야산에서 봉화가 올라가고 이를 계기로 여러 곳에서 산 위에 불을 피워 놓고 만세를 불렀다.

담양의 만세시위는 조직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지주회 서기, 면작조합 주사, 군청 고용인 등 하급 관리들이 대거 참여한 데다 경고문을 작성해 일반 군중과 학생들을 규합해 운동을 주도하려 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비록 첫 번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만세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이듬해 1월 창평면에서는 조보근 한익수 등이 동지 10명과 함께 수십 장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1920년 1월 23일 이들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가를 합창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창평면 소재지를 행진했다. 일본 경찰에 붙잡힌 조보근은 징역 1년, 한익수는 징역 8월을 받았다. 향토사학자들은 창평면의 만세운동을 정기환 등이 계획한 담양읍 시위의 연장선상으로 분석하고 있다.

담양의 3·1운동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인물은 고하 송진우(1890∼1945)다. 고하는 일찍이 장성 출신 의병장 기삼연(1851∼1908)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민족의식을 함양했다. 기삼연은 을미사변을 계기로 1896년 의병을 일으킨 후 체포됐다가 탈옥해 송진우 생가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이후 창평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1891∼1955)와 함께 수학하며 인연을 맺었다. 1915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고하는 1919년 1월 도쿄에서 귀국한 유학생 송계백을 만난 것을 계기로 국내 3·1운동을 기획했다. 일제로부터 3·1운동 주도 인물 48인으로 분류된 그는 3·1운동 직후 체포됐다. 고하는 1921년 동아일보 제3대 사장, 1927년 동아일보 제6대 사장을 지내며 1936년 8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