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대한통운 중구지점의 택배기사 원성진 씨는 퇴근 후에는 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며 화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CJ대한통운
원 씨는 “서울 만리동 주택가와 공덕동 택배 터미널을 오가며 일을 하면서도 늘 파도가 보고 싶었다. 파도를 화두로 사색을 하고 집에 가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덧 개인전을 열게 됐다”며 웃었다.
원 씨가 택배일을 시작한 건 2017년 2월이었다. 기업에도 다녔고, 사업도 했다. 마지막으로 부동산 중개업을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뛰어든 택배일이 이젠 직업이 됐다. 지금은 월 500만∼600만 원을 벌 만큼 수입도 짭짤하다. 하지만 원 씨에게 택배는 직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렸을 적 못다 한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원 씨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미술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누가 그림을 가르쳐 준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택배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무작정 텅 빈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림을 붓이 아닌 화도(그림용 나이프)로만 그린다. 원 씨는 “붓보다 화도가 그림 그리기가 더 편하고,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림의 느낌이 더 날카로우면서 거칠게 느껴졌다.
지난해 4월 그는 서울 종로구 삼청로 코소(COSO)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을 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품을 들고 갤러리 수십 곳을 찾아다녔지만 작가 경력이 없던 그의 작품을 받아줄 리 없었다. 하지만 코소 갤러리에서 “일단 반나절만 그림을 걸어놓고 반응을 보자”고 제안했다. 전문적이진 않지만 독특한 색감과 화도의 터치를 신선하게 본 관계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그 인연으로 이달 26일부터 6일 동안 같은 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도 열게 됐다.
18일은 그의 첫 시집이 책으로 출간된 날이기도 하다. 시집의 제목은 ‘맴돌다가’였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거치면서 써내려갔던 글귀를 모은 시집이다. 그는 시에 쓴 몇 개의 구절을 가져와 그림의 제목으로 쓰기도 했다. 펜으로 쓴 글귀가 그림으로 승화된 셈이다.
원 씨는 “나를 ‘그림을 그리는 택배기사’로만 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며 “그림을 그릴 땐 화가요, 시를 쓸 땐 시인이요, 택배를 할 땐 그저 택배기사라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싶다”고 말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