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43화>강원 양양
지난해 강원 양양군에서 열린 3·1운동 재현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치고 있다. 양양은 만세운동에 1만5000여 명이 참가하고 시위 과정에서 13명이 피살될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다. 양양군 제공
7일 찾은 강원 양양군 ‘만세고개’ 한쪽에 서 있는 비에 적힌 글의 일부다. 양양군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위의 현장 만세고개에 유적비를 세웠다. 태극기를 새긴 타원형의 주비(主碑)에는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의 군상이 조각돼 있다. 왼쪽 비에는 만세고개의 유래, 오른쪽 비에는 당시 상황과 희생된 애국지사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 9명의 피로 만들어진 만세고개
강원 양양군 현북면 만세고개의 3·1운동 기념물. 일제의 총탄에 9명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양양=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
미리 시위 정보를 입수한 일제 경찰은 언덕에서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다 일제히 발포했다. 사망자 9명, 부상자가 20여 명이 발생하고 시위 현장은 피바다가 됐다. 전원거 임병익 홍필삼 고대선 황응상 김석희 문종상 진원팔 이학봉 등이 희생됐다. 현재 만세고개에는 도로가 생기는 등 변화가 커 옛 흔적을 찾기 어렵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의 느낌만 남아 있다.
양양군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도 규모나 내용에서 3·1운동이 전개된 지역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곳 중 하나로 꼽힌다. 양양군에 따르면 4월 4일을 시작으로 9일까지 6일 동안 1만5000명이 넘게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군 인구는 3만6000명으로 추산된다. “시위 때 집집마다 한 사람은 나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세운동의 열기가 뜨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13명의 사망자,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체포자는 부지기수였다.
특히 4월 5일 대포항 만세시위에는 1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하자 경찰이 완전히 굴복하고 사죄했고, 군중은 다음 날 양양읍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해산했을 정도다. 또 4월 6일 시위대가 제지하는 군대를 밀어내고 읍내 경찰서로 몰려가자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테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해 군중이 만세시위만 벌이고 저녁때 돌아가기도 했다.
○ 유림의 이석범과 기독교(개신교)의 조화벽
양양의 만세운동을 이끈 유림 이석범 선 생(왼쪽 사진)과 기독교의 조화벽 지사. 양양문화원 제공
이석범은 고종 황제의 인산(因山·장례)에 참례하고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뒤 거사를 추진했다. 그는 아들 이능렬과 김영경 장세환 등 쌍천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요 임무를 맡겼다. 이석범은 문중의 큰 부자였던 이교완의 집을 본거지 삼아 최인식 등 30세 전후의 청장년층을 모았다.
3월 말경 조화벽은 개성에서 돌아올 때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숨겨 왔다.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다니던 그는 기숙사생으로 구성된 비밀결사대원으로 활동하다 일제의 휴교 조치로 고향으로 향했다. 이 선언서는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전해졌다. 김필선은 같은 양양보통학교 졸업생이자 교우(敎友)들인 김재구 김규용 김계호 등을 모았다. 이들은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해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교회 인근 상여 보관처에 숨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최인식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거사를 추진하게 됐다.
하지만 4월 3일 일본 관헌들이 급습해 태극기를 만들던 사람들과 총지휘자 이석범을 비롯한 22명을 체포했다. 체포를 피한 최인식 김필선 등은 거처를 옮겨 밤새 준비했고, 4월 4일 계획대로 큰 시위가 벌어졌다.
조화벽은 훗날 유관순 열사의 오빠인 유우석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항일 독립운동으로 구금과 석방을 되풀이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한다. 1932년 양양으로 돌아온 조화벽은 정명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헌신한다. 이 학교는 일제 탄압으로 1944년 폐교되기 전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도자 그룹이 대거 검거되면 운동이 지리멸렬해지기 쉽지만 양양의 만세운동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 소장은 이에 대해 “양양은 지금의 서울보다 큰 면적이기 때문에 연락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군에 걸쳐 만세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 것은 유림을 앞세워 구장까지 가담시킨 치밀한 조직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 함홍기 열사, 서장에게 화로를 던지려다 순국
동아일보와 양양군협찬회가 1974년 건립한 양양읍 현산공원의 3·1운동 기념비.
군중은 경찰서와 군청을 에워싸고 임천리에서 체포한 22명을 비롯한 감금자를 석방하고 일본 관헌은 자기 나라로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몇 사람은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손양면 가평리 구장 함홍기는 일본 경찰서장에게 화로를 들어 던지려다 일본 경찰 두 명에게 양팔이 잘린 후 목을 찔려 죽었다. 그의 시신은 경찰서 내 복도에 가마니에 덮여 있다가 10여 일 뒤 가족에게 인계됐다. 마을 주민이 모인 뒤 장례를 치렀으나 일본 경찰은 동네 주민이 모여 울었다는 이유로 하관 직후 파헤치고 관을 깨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양양의 만세운동에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뿐 아니라 천도교와 불교도 만세운동에 가세했다. 일제의 기록과 당시 증언 등에 따르면 4월 7일 오후 2시 반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약 3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하여 양양읍내에 들어오자 일제 경찰은 주모자 4명을 체포했고, 시위대는 해산됐다. 낙산사 승려들도 이날 오후 7시 바라 소리와 더불어 전 승려들이 등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양양=김갑식 문화전문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