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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마약, 현실에선 죽련방 밀수 폭증

입력 | 2019-02-15 16:43:00


마약 수사를 다룬 1000만 관객의 영화 ‘극한직업’에는 폭력조직이 마약의 일상화를 꿈꾸는 장면이 나온다. 치킨 배달을 하면서 소금 봉지에 마약을 넣고 팔아 막대한 수익을 올리다가 꼬리가 잡힌다.

영화 못지않게 현실에서도 마약은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지난해엔 대만의 가장 큰 폭력조직 ‘죽련방(竹聯幇)’이 한국 마약시장을 뒤흔들었다.

지난해 7월 인천지검이 확보한 죽련방의 필로폰 약 1kg. 당시 죽련방 판매책의 스포츠 가방에는 총 10kg의 필로폰이 1kg씩 비닐로 포장돼 있었다. 이후 대구지검에서 압수한 필로폰 28.5kg도 마약 성분과 순도 등 마약지문이 동일하게 나왔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됐다는 의미다. 대검찰청 제공

죽련방은 1955년 결성될 때 대나무 밭에서 자주 싸움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해부터 죽련방은 마약 수출지로 한국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죽련방의 공격적인 침투로 한국에 밀수된 필로폰은 역대 최고량을 경신했다. 검찰과 경찰이 지난해 압수한 죽련방의 필로폰은 총 152.3kg에 달한다. 산술적으로 508만4815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다. 2015~2017년 3년간 전체 필로폰 압수량을 다 합친 것(114kg)을 훌쩍 넘긴 것이다. 1980년대 한국 ‘마약왕’이 사라진 이후 초유의 사태였다.

● 대만 마약 공장의 필로폰이 한국으로

지난해 4월 대만 현지 언론들은 대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마약생산 공장이 적발됐다는 내용을 앞다퉈 보도했다.

이 공장은 죽련방이 관리하고 있던 곳으로, 필로폰 3t을 만들 수 있는 양의 원료와 완성품 107kg이 현장에서 발견됐다. 현지 언론은 이 공장에서 생산된 수많은 양의 필로폰이 이미 해외로 유통됐을 거라고 추정했다.

죽련방의 공장에서 생산된 필로폰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 수사당국도 이 뉴스가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두 달 전인 그해 2월 12일, 대만인 1명이 필로폰 2kg을 몸에 숨기고 말레이시아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압수된 그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채팅 기록을 통해 다음 날 김해공항을 통해 도주하려던 공범 2명도 체포됐다. 나흘 뒤 또 다른 대만인 1명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적발됐다. 일주일이 되지 않는 기간에 대만인 4명이 연이어 체포된 것이다. 이들은 서로 친구였다.

인천지검 강력부는 이 사건들이 일회적 범행이 아니라 대만인들이 관여된 조직적 필로폰 밀수범행으로 판단했다. 이들은 공장에서 생산된 필로폰을 해외로 날랐던 죽련방의 마약 운반책들이었다.

필로폰 밀수가 수차례 실패하자 죽련방도 작전을 바꿨다. 지난해 4월부터는 말레이시아-인천국제공항 대신에 대만 쑹산국제공항-김포국제공항으로 밀수 루트를 변경했다.

죽련방의 운반책들은 필로폰 2kg을 나누어 복부, 허벅지, 가슴 등에 붙이는 수법을 이용했다. 필로폰을 담은 비닐봉지를 몸에 붙이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동이 불편한 게 단점이다. 따라서 비행기에서 내려 세관 검색대를 거쳐 출구까지 나가는 거리가 비교적 짧은 김포국제공항이 제격이라 판단한 것이다.

죽련방은 간부들의 신원을 숨기는 방식도 철저했다. 조직 간부들의 신원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운반책에게 휴대전화를 반납하게 하고 별도의 아이폰을 제공했다. 아이폰에 미리 저장된 앱 아이디를 통해서만 조직 상층부와 연락하게 했다.

● 소금으로 수사당국 시험…인해전술

지난해 7월 인천지검이 확보한 죽련방의 필로폰 약 1kg. 당시 죽련방 판매책의 스포츠 가방에는 총 10kg의 필로폰이 1kg씩 비닐로 포장돼 있었다. 이후 대구지검에서 압수한 필로폰 28.5kg도 마약 성분과 순도 등 마약지문이 동일하게 나왔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됐다는 의미다. 대검찰청 제공

죽련방의 필로폰 밀수 방식은 인해전술에 가까웠다. 지난해 2~7월 필로폰 밀수에 가담한 대만인은 총 19명, 적발된 밀수량은 33.8kg이었다. 이들은 필로폰 2kg~3.8kg씩 몸에 숨기고 들어왔다. 20대 청년이 대다수였고, 16세 청소년까지 범행에 가담했다. 죽련방은 감시책을 운반책과 함께 한국으로 보내 지근거리에서 운반책들이 무사히 세관을 통과하는지 체크하고 호텔에서 필로폰을 회수하는 역할을 맡겼다.

죽련방은 한국 수사당국의 필로폰 적발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소금을 보낸 적도 있다. 지난해 5월 한 운반책은 소금 2.5kg을 몸에 숨기고 대만에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 소금은 크리스털가루 형태인 필로폰과 외형상 비슷하다. 은닉한 물건이 필로폰은 아니지만 검찰은 마약류 범행을 범할 목적으로 입국한 사실을 확인해 ‘소금 운반책’을 마약류불법거래방지특례법에 따라 구속 기소했다.

그러나 운반책들은 검찰에서 “죽련방의 필로폰은 이미 전국으로 퍼져 있다”고 진술했다. 인천지검은 체포된 운반책들로부터 “부산역 앞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한국인 여성 A 씨(51)를 만나 필로폰이 든 백팩을 전달해줬다”는 진술에 힌트를 얻었다. 지난해 7월 검찰은 부산역 주변 폐쇄회로(CC)TV를 전수 조사해 중간 알선책인 A 씨를 검거했다. 또 A 씨의 협조를 받아 위장거래를 통해 필로폰 10kg을 소지하고 있던 대만인 B 씨(28)를 긴급체포하고 필로폰은 현장에서 압수했다. 다만 거주지에 숨겨뒀다 사라진 B 씨의 필로폰 28.5kg을 압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 “통거래만 한다” 죽련방의 통 큰 거래

나머지 필로폰은 추적이 쉽지 않았다. 위장거래도 어려웠다.

검찰은 처음엔 소매상인 척 죽련방 대만인 판매책에게 접근해 “샘플 거래를 하자”고 제안했다. 마약거래는 마약이 진품인지 확인하기 위해 샘플거래부터 먼저 하는 게 통상적 절차다. 하지만 “우리는 ‘통거래’만 한다”며 판매책이 제안을 거부했다. 판매책은 kg단위로 살 수 있는 ‘도매상’을 원했다. 1kg당 시가는 5000만 원으로 검찰이 당장 그 정도의 현금을 마련하긴 어려웠다.

판매책은 필로폰을 ‘통’으로 살 도매상을 찾아 대구로 떠났다. 검찰은 관할지검인 대구지검에 이 정보를 알렸다. 지난해 8월 검찰은 이번엔 도매상인 척 먼저 “통거래를 하자”며 접촉했다. 판매책은 “5kg을 3억 원에 팔겠다”고 통보했다. 미끼를 문 것이다. 다행히도 검찰은 협력기관에서 십시일반 모은 현금으로 3억 원에 가까운 돈을 조성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현금은 준비했지만 이번엔 판매책이 접선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근처에 몰래 온 판매책이 구매자로 위장한 마약수사관의 얼굴 등 인상착의만 확인한 후 떠나버린 것이다. 외부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마약수사관들이 현금다발을 들고 접선장소에 다시 나갔다. 결국 접선 다섯 번째 만에 판매책 2명이 현장에 나와 체포됐고 검찰은 필로폰 5kg과 함께 호텔에서 보관하고 있던 나머지 23.5kg도 추가 압수했다.

압수한 필로폰은 인천지검이 B 씨와의 위장거래로 압수한 필로폰 10kg과 ‘마약지문’이 일치했다. 같은 공장에서 생산됐다는 것이다. 검찰이 반입 경로를 추적한 결과 모두 B 씨가 지난해 6월 항공화물 컨테이너에 몰래 숨겨 들여온 것으로 밝혀졌다. 마약 지문은 마약의 성분을 분석해 나온 결과로 공장마다 생산된 마약의 성분과 그 순도가 각기 다르다. 과거 북한산 마약이 순도가 높아 인기가 좋았듯 공장마다 품질에 차이가 난다.

인천지검과 대구지검은 지난해 10월 죽련방 필로폰 밀수·유통 관련 대만인 20명과 한국인 2명을 구속 기소하고 도주한 대만인 5명에 대해서는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요청했다. 압수량은 총 62.3kg으로 소매가 2080억 원어치다.

죽련방의 필로폰 밀수는 최근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인천지검은 지난해 12월부터 지난달까지 단기간에 말레이시아인 8명을 필로폰 13.3kg 밀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모두 죽련방이 생산해 수출한 필로폰인 것으로 검찰은 의심하고 있다.

● 지난해 한국 마약 밀수 8.4배 폭증

수사당국은 한국이 더 이상 마약청정국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마약 조직들의 주된 수입국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국제 마약조직사회에서 한국은 대량의 필로폰을 소화할 능력이나 수요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일본 등 제3국으로 필로폰을 밀수하기 위해 이용되는 중간경유지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2017년(35.2kg)에 비해 지난해 적발된 마약 밀수량(298.3kg)이 약 8.4배 증가했듯 한국이 경각심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마약 밀수 수사는 해외 수사기관과 공조해 정보를 입수하는 게 관건이다. 공항 입국장에는 X레이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정보 없이 마약사범을 잡는 것은 어렵다. 한국은 언더커버(마약·폭력조직 위장잠입 수사)가 불법이기 때문에 그 외 홍콩, 마카오 등 합법인 국가가 가진 정보를 입수하는 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한국은 마약청정국이라는 인식 때문에 마약이 어느새 우리 사회에 깊숙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며 “마약·조직범죄는 초국가 범죄이므로 긴밀한 국제 공조가 필요하며 국내 유통을 막기 위해 수사당국의 효율적인 대응체계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