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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암살 2주기와 북한외교의 르네상스[하태원 기자의 우아한]

입력 | 2019-02-15 14:01:00


지난 13일은 ‘비운의 황태자’로 불렸던 북한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테러로 사망한지 2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유일영도체제’ 아래서 백두혈통을 가진 잠재적인 권력경쟁자가 맞을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최후를 전 세계가 목도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백주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의 이동이 활발한 제3국의 국제공항에서 대담하게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독재정권의 잔인함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김정남은 후계자로 지명된 이복동생 김정은에게 “저와 제 가족에 대한 응징명령을 취소해 주기 바란다. 피할 곳도 없고, 도망갈 곳은 자살뿐”이라고 애걸했지만 북한 절대 권력자의 ‘스탠딩 오더(암살 실행 때까지 유효한 명령)’는 번복되지 않았습니다.

2017년 2월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에 보도된 김정남 암살 사건.


북한의 테러요원들은 이 모든 공작을 제3국 젊은 여성 2명을 동원해 ‘완수’ 했습니다.

김정남의 얼굴에 맹독성 신경작용제 VX를 발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두 여인 도안 티 흐엉(베트남 국적)과 시티 아이샤는 체포 직후 “리얼리티 쇼를 찍는 줄 알았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그들은 말레이시아에 구속된 상태로 2017년 10월부터 3년 째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는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피고인들은 사건 관련 증인들의 진술 내용을 보여 달라며 항소했고, 지난 1월 24일 항소법원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재판재개는 3월 11일이고 선고는 올해 하반기 쯤 이뤄질 것으로 보입니다.

말레이시아 형법은 고의로 살인을 저질렀을 경우 원칙적으로는 사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사형제 폐지 분위기가 생기면서 관련법이 정비될 때 까지 사형집행을 전면 중단한 상태입니다.

김정남 살해 혐의로 체포된 도안 티 흐엉(왼쪽)과 시티 아이샤.


암살에 관여했던 북한인 8명은 모두 ‘무사히’ 말레이시아를 떠났습니다. 발견 당시 ‘김철’ 이란 이름으로 북한 국적 여권을 가졌던 김정남의 시신도 본인과 가족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북한으로 옮겨졌습니다. 사건 직후 아들인 김한솔이 시체 수습을 위해 말레이시아로 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지만 ‘오보’로 판명됐습니다.

판결결과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2년여 간의 재판이 진행되면서 미묘한 기류변화도 감지됩니다. 북한의 테러 직후 말레이시아는 자국의 평양대사관을 사실상 폐쇄했고 북한의 외교관들에 대해서도 추방조치를 내렸습니다. 1973년 수립된 외교관계가 사실상 단교상태로 간 셈입니다.

말레이시아 검찰이 ‘김정남 피살’ 사건의 용의자인 리정철을 석방 후 추방하기로 결정한 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북한대사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리동일 전 북한 유엔대표부 차석대사(가운데).


하지만 최근 말레이시아 총리는 북한과의 외교관계 복원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는 “북한과의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돼 있다”며 대사관 폐쇄를 해제할 가능성을 내비쳤습니다. 2018년 과감하게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3차례 남북정상회담, 3차례 북-중 정상회담, 그리고 첫 북-미 정상회담까지 이끌어낸 것이 주효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 여성이 연루되면서 냉랭한 기류가 흐르던 양국 관계는 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난해 12월 북한이 김정남 암살 사건에 베트남 여성을 끌어들인데 대해 비공식적으로 사과했다는 보도가 그 시발점인 셈이었습니다. 이달 말 하노이에서 열리는 북-미정상회담의 무대로 베트남이 선정된 것 역시 북-베트남 관계의 개선과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김정은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베트남을 국빈방문 합니다. 할아버지 김일성이 두 차례(1958년, 64년) 방문했던 그 길을 55년 만에 재현하는 겁니다.

그러던 사이 김정남 피살사건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해야 한다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화해무드를 방해하는 세력이라는 힐난도 이어집니다.

김정남이 피살 직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현지 경찰이 신경작용제 ‘VX’ 수색 및 제독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외교가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스웨덴 독일 등을 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동남아 지역에서는 북한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싱가포르가 이미 지난해 6월 첫 북-미 정상회담 특수를 톡톡히 누렸고, 2차 북-미 정상회담 장소를 두고도 베트남을 포함한 많은 동남아 국가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 몰락 이전까지 동남아 지역은 북한 외교의 주 무대였습니다. 이른바 제국주의 침탈의 공동 피해자라는 인식하에 유행처럼 번졌던 ‘비동맹 외교’에 집중했던 탓이기도 합니다.

북한이 은둔의 터널에서 벗어나 정상국가로 가는 것을 맞자는 뜻은 아닙니다. 과감한 개혁·개방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서도 다양한 국가들과 정상적인 교류협력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베트남 역시 같은 길을 열었고, 북한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중국 역시 이미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한지 오래입니다.

다만 북한이 제대로 된 정상화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음습했던 과거, 그리고 국제사회의 법규를 무시했던 과오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권문제를 제대로 개선하지 않는다면 북한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 하원의장인 낸시 펠로시 의원이 문희상 국회의장을 비롯한 초당적 의원외교단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은은 고모부(장성택)도 죽인 사람이다. 나는 북한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김정남 암살 2년을 의식한 발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태원 채널A 보도제작팀장(부장급·정치학 박사수료)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