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김서령 지음/268쪽·1만5000원·푸른역사
강세황(1713∼1791)의 표암첩(豹菴帖)에 수록된 ‘무’. 저자는 “가을이 되어 햇살과 바람 속에 서서 그 푸른 무를 한 입 와사삭 깨물어 먹는 입, 그런 순도 100%의 기쁨이 또 있을까”라며 무가 빚어낸 싱그러운 단맛을 표현한 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노상 날로만 먹을 순 없을 터. 저자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는 추운 밤 이웃들이 모여 배추적을 함께 구워먹었다. 물을 끓여 날배추를 데치고 한쪽에선 밀가루를 개고, 다른 쪽에선 들기름 칠할 무를 깎는다. 맑은 간장에 파 마늘을 다져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을 살짝 친 양념간장은 손맛 좋은 저자 어머니의 몫이었다.
배추적은 깊은 맛을 가진 음식이라고 한다. 깊은 맛을 알려면 반대인 얕은맛을 보면 된다. 얕은맛이란 혀에서만 달아, 먹고 난 후엔 조금 민망해지는 그런 맛이다. 고기나 생선처럼 그 자체로 맛이 뛰어난 음식들이 대표적이다. 반면 깊은 맛은 먹고 나서 전혀 죄스럽지 않다. 빈 접시가 부끄러울 리도 없다. 양념장이 없으면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밍밍한 맛이다. “얕은맛이 혀가 느끼는 맛이라면 깊은 맛은 위가 느끼는 맛이다. 어쩌면 ‘깊은’과 ‘얕은’이란 수식은 그것을 느끼는 신체 부위의 심천(深淺) 때문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저자의 설명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김서령 작가.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안동지방 양반가의 내실 풍속과 사랑채 역사를,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감정세계를 속속들이 알고 손에 잡힐 듯 묘사하는 작가를 이제 우리 문학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요”라며 아쉬워했다. 동아일보DB
TV프로그램에서 범람하는 ‘먹방’이 결코 주지 못하는 위로를 선사한다. 불린 햅쌀을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붓고 끓인 ‘갱미죽’. 이 음식은 햇볕을 실컷 받고 천천히 여문 쌀알을 다시 낮은 열로 뭉근히 익힌 후 오래 묵은 간장을 똑똑 끼얹어 먹는 죽이다. “입안의 엷은 상처를 순하고, 따스하며 다정하게 어쩌면 슬쩍 서러운 듯도 하게, 상처에 바르는 연고처럼 솨르륵 도포한다”는 대목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레 아플 때 어머니가 끓여주던 흰죽이 떠올라 따스한 행복을 느끼게 된다.
달지 않지만 들큰하고 맵지 않지만 알싸한 밥도둑 ‘집장’, 음력 오뉴월에 담가 먹던 찹쌀 술 ‘정향극렬주’와 봄을 알리는 ‘냉잇국’ 등 30편의 행복한 음식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지막 편인 ‘간고등어’와 ‘헛제사밥’을 쓰다가 그치고 만 저자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저자는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났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