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적극적 주주권 행사]국민연금, 한진칼 경영 제한적 참여
하지만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데다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지침)의 구체적인 기준조차 마련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선례를 남겼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찬반 격론 끝에 나온 우려되는 절충점
이날 회의에 참여한 위원장과 위원 11명은 4시간을 훌쩍 넘긴 회의 내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격론을 벌였다. 전체 참석자 중 관료와 노동계 및 참여연대 관계자가 7명에 이르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어서 찬성 의견이 다소 많았지만 논리 대결에서는 반대론자도 밀리지 않았다.
반면 친노동 성향 인사들은 “조 회장 일가를 향해 최소한의 상징적 행위라도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회의 직후 A 위원은 “일부 위원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활용하라’는 주문을 의식한 듯 ‘국민의 요구가 있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토론을 통한 합의로 결론을 내자’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의 제안에 따라 표결은 진행되지 않았다. 기금위 B 위원은 “위원 11명 중 찬성과 반대가 6 대 5, 7 대 4 정도로 엇비슷했다”고 전했다.
국민연금은 한진칼에 이사가 회사나 자회사 관련 배임이나 횡령 등으로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즉시 사퇴한 것으로 간주하자는 정관변경안을 8일까지 제안할 예정이다. 기금위 C 위원은 “이런 규정은 공공기관이나 금융회사에만 있지 보통의 민간 기업은 정관에 반영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했다. 박 장관은 지난달 31일 주주 제안을 한 사모펀드 KGCI와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은 독자적 행동을 하는 곳”이라며 선을 그었다.
○ 국민연금 지분 5% 이상 기업들 안심 못해
하지만 이번 결정으로 국민연금 보유 지분이 5∼10%인 기업들이 정관변경 요구를 받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1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민연금 지분이 5% 이상 10% 미만인 상장사는 총 213곳이다. 삼성전자(9.99%) 현대자동차(8.27%) LG전자(8.65%) SK(8.40%) 미래에셋대우(9.99%) 등 주요 대기업들이 포함돼 있다. 배당 성향이 낮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업이 다음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국민연금은 한진칼에 이어 다른 기업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용할 경우 신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불법행위로 ‘오너 리스크’가 부각된 기업만을 선별해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취지다.
무엇보다 5% 이상 지분 보유 기업에 제한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부담은 여전하다. 특정 기업 지분을 5% 이상 가진 투자자가 경영 참여를 목적으로 하면 지분 1% 이상 변동 시 변동 내용을 즉시 공시하도록 하는 ‘5%룰’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이 경우 국민연금의 매매 전략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국민연금을 5%룰 적용 예외로 두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 국민연금의 과도한 경영 간섭 논란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자칫 과도한 기업 경영 간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국민연금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장을 복지부 장관이 겸임하고 있고, 기금운용본부장 추천권을 가진 국민연금 이사장도 정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구나 지난달 23일 전문가집단인 수탁자책임전문위 과반이 적극적 주주권 행사에 반대했는데도 문 대통령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적극 행사하겠다고 밝힌 뒤 이번에 기금운용위가 전문위의 결론을 뒤집은 것이다. 정치적 결정 아니냐는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이건혁 gun@donga.com·강유현·배석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