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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日, 히로시마는 기억하면서 이웃에 저지른 잔인한 범죄는 잊어”

입력 | 2019-01-22 03:00:00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제암리 학살 반성하는 ‘日의 양심’




1919년 4월 15일 경기 화성시(옛 수원군) 향남읍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 직후 희생자 유족들이 넋을 잃고 있다(위쪽 사진). 일본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이 제암리 학살 사건에 대한 사죄를 하려고 발족한 ‘한국 제암 교회 화공(火攻) 사건 사죄위원회’에서 발행했던 자체 제작 신문. 동아일보DB·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

“히로시마, 나가사키는 잊지 않으려 하는데 이웃나라에 저지른 더 잔인한 범죄는 잊으려 한다.”

일본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이 100년 전인 1919년 4월 15일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반성하면서 남긴 글이다. 3·1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일제의 만행 가운데 가장 잔인했던 경기 화성(옛 수원군) 향남읍 제암리 학살 사건을 두고 반성했던 일본 지성인들의 행보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도쿄 고려박물관은 다음 달 6일부터 3·1운동 100주년 관련 전시회를 열고 한국에 사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족된 ‘한국 제암 교회 화공(火攻) 사건 사죄위원회’의 활동 기록을 공개한다.

위원회의 활동이 최근에 있었던 일은 아니다.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93) 목사는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후인 1967년 12월 일본의 양심적인 지성인 15명과 함께 사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모금 운동을 진행했다. 오야마 목사가 당시 선언문에서 “36년간 일본인에 의한 식민 통치, 그로 인한 온갖 악한 학대와 비도덕적인 행위가 있었다. 많은 일본인이 참여해야 (사죄의) 의미가 있다”고 밝히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이듬해 2월 ‘1969년 3월 말까지 교회 재건비 1000만 엔(약 1억 원)을 목표로 한다’는 모금 취지서를 발표했다. 이후 위원회는 일본인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보상’이라는 제목으로 4쪽짜리 자체 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문은 1969년 6월까지 총 11호가 발간됐는데 신문에 실린 글 중 하나가 바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피해보다 제암리를 먼저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1968년 9월에 발행된 5호 신문에는 “한국의 식민지화를 위해 우리(일본)가 범한 죄는 헤아릴 수 없다”며 반성의 뜻을 내세웠다.

사죄위원회 위원들은 당시 매달 1, 2회 회의를 열며 총 16차례 회의록을 작성했다. “1968년 2∼3월 한국에 출장. 모금 운동에 대해 한국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3회 회의록), “1000만 엔을 500만 엔씩 2회 나눠 전달하는 것을 고려해 보자”(4회), “아사히신문, NHK 등 보도 기관에 홍보하자”(10회) 등 모금 과정과 홍보 방법 등도 자세히 적혀 있다. 당시 모금에 참여한 인원은 600여 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실제 모금 운동에 참여했던 하라다 교코(原田京子) 고려박물관 이사는 “익명의 기부자도 적지 않아 실제로는 그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시 자료는 그동안 독립기념관에 아카이브 형태로 보관돼 있었다. 1967년 이후 사죄위원회의 활동 일지와 모금자 명단의 기록 등 총 185점으로 한국 독립기념관 건립이 추진되던 1987년 기증받은 것이지만, 그동안 국내에도 전시 형태로는 공개되지 않았다. 당시 사건 자체를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제암리 학살 사건과 관련된 일본인의 자료 전시는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 처음이다. 윤소영 독립기념관 학술연구부장은 “당시 경색됐던 한일 관계를 풀고 한국에 사죄하기 위해 일본의 시민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전시를 준비하는 일본인은 총 8명으로 대부분 자원 봉사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아오야기 준이치 씨는 “3·1운동의 역사를 상당수 일본인이 잘 모르고 있다”며 “한일 관계가 얼어붙은 이런 때일수록 많은 일본인에게 제대로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라다 이사는 “정치적으로 대립된 현재 한일 관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3·1운동과 관련된 일제의 만행 중 가장 잔인했던 일로 꼽힌다. 그해 3월 30일과 4월 5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동네 주민들을 수원에 주둔하던 일본 헌병 제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교회에 집합시킨 뒤 불을 질러 23명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도쿄=김범석 특파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