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길은 총 31㎞, 3·1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길이다. 100년 전 시위대가 걸었던 이 발걸음이 중요한 것은 그 길이 화성(옛 수원군) 향남읍 제암리로 이어져서다. 위기감을 느낀 일제는 검거반을 파견했지만,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화수리와 인근 수촌리 일대의 만세운동을 접한 진압부대는 이곳의 집을 불태웠고 폭력과 살상을 자행했다.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도 진압 부대 중 하나였다. 그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지휘했고, 일제가 요식행위로 벌인 군법회의에서 ‘임무수행을 했을 뿐 범의(犯意)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시체 타는 냄새가 밤새 바람에 실려 왔다”
‘일본 군인 아리타 중위가 인솔하는 부대 약 20명이 이곳을 포위하고 동리 남자는 예배당으로 모이라 하였다. 영문을 모르고 예배당에 모인 군중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일제의 군경은 문을 밖과 안으로 잠그고 못까지 박은 후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예배당을 휩싸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뛰어나오려고 아비규환 생지옥을 연상케 하였다. 다행히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밖에서 대기하던 일제 군경이 총으로 쏘아 죽였다. (…) 천인이 공노할 일제의 만행으로 23명이 희생되었다.’
이런 기록만으로도 얼마나 처참한 사건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지만, 1982년 8월 4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전동례 할머니의 지상(紙上) 증언에선 그날의 참혹함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밤하늘을 밝혔으며 곡식 타는 냄새, 시체 타는 냄새가 밤새 바람에 실려 왔고 서까래가 내려앉고 기둥이 쿵쿵 넘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나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계신 남편과 다시 만날 때까지 몸서리치는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도 채소를 갈기 위해 마당 모퉁이를 뒤엎다 보면 그날 검게 탄 쌀알이 나온다.’
제암리 학살사건의 최후 증인인 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그해 9월 발굴 작업이 진행됐고 23위의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기록한 ‘전동례 할머니는 남편일지도 모르는 한 유해의 정강이뼈 부근을 쓰다듬으며 끝없는 눈물을 흘렸다’(1982년 9월 25일자 1면)는 장면은 지금 읽어도 참담하고 애통하다.
유해가 안치돼 합장묘가 조성된 곳은 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의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뒷동산이다. 8일 방문한 기념관 가는 길에는 태극기가 나부꼈다. 기념관엔 화성 일대에서 전개된 3·1만세운동의 배경을 알려주는 사진들, 희생자 유가족들의 증언을 담은 인터뷰 영상, 유해발굴지에서 출토된 유물 등이 전시돼 있었다. 검게 탄 단추와 깨진 병, 교회 건물 잔해 등 작은 유물만으로도 당시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 격렬한 저항정신이 빚은 무력투쟁
제암리 사건 전 주민들에 의해 처단된 순사는 가와바타뿐만이 아니었다.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의 사강시장 장날에 모인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송산면사무소 부근에서 만세를 불렀다. 해산을 명령했던 일본 순사 노구치 고조는 사람들이 불응하자 시위를 주도했던 홍면옥(1884~?)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를 보고 분노하는 주민들에게 노구치는 위기감을 느꼈고 도주했지만 곧 붙잡혀 처단됐다. 사흘 뒤엔 향남면 발안시장에서 10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화성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것은 2주 정도로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동안 면사무소 2곳, 경찰관주재소 1곳이 완전 파괴됐고 일본인 순사 노구치와 가와바타가 처단됐다. 일제가 참살이라는 극단적인 진압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화성의 무력 저항이 거셌다는 뜻이다. 화성의 만세운동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혜영 화성시 독립기념사업팀 학예사(전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선임연구원)는 “만세길의 경우 시위대의 이동거리가 31㎞에 달한다. 마을마다 사람들이 미리 준비해서 합류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일제는 이렇듯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독립운동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정찰 결과 격렬한 소요 원인이 제암리의 기독교도와 천도교도에게 있으며 제암리가 만세운동의 근거지라고 판단했다.
이혜영 학예사는 화성 일대의 주민들이 일제에 맞서 격렬한 무력 투쟁을 벌인 데 대해 “경제적 상황과 사회적 여건, 지역적 특성이 맞물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시대부터 선진적 영농의 중심지였기에 일제의 집중적인 수탈과 탄압의 대상이 되면서 그만큼 저항의식도 컸다는 것이다.
더욱이 화성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빨랐다. 학교와 교회 등 서양의 종교와 교육제도가 인천을 통해 들어왔고 서울과 비슷한 시기에 자리 잡았다. 학살사건이 벌어진 제암교회는 제암리에 살던 안종후가 1905년 8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 됐다. 이후 화성 일대 곳곳에 예배당이 지어졌고,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구국동지회 등 비밀결사를 조직해 지역내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앞서 1880년대에는 이 지역에 천도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됐고 1910년대에 수원군내와 장안면 등에 천도교의 교리강습소가 설치되면서 기독교와 함께 이 지역 3·1운동의 기반이 되었다(박환, ‘경기지역 3·1독립운동사’).
4월 15일은 제암리 희생자들의 100주기다. 이날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일대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이에 앞서 3월 1일 태안로 화성아트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이 개최되며 시민들이 참여하는 100주년 기념 공공아트 프로젝트, 국내외 학계 전문가들을 초청하는 국제심포지엄도 진행될 예정이다.
화성=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