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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형준]윤증현, 진념 전 장관의 소신과 강단이 그립다

입력 | 2018-11-06 03:00:00


박형준 산업1부 차장

2008년 말 기획재정부 출입기자 시절이었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내 기업들이 줄도산했다. 그해 12월 취업자 수는 1년 전보다 1만2000명 줄었다. 월별 취업자 수가 마이너스를 기록한 건 5년 2개월 만이었다. ‘실업 대란’, ‘최대 위기’와 같은 단어가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했다.

2009년 2월 윤증현 김&장법률사무소 고문이 새 기재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그해 성장률 전망치와 일자리 수를 마이너스로 발표했다. 경제전문가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적당히 숫자를 분식(粉飾)해 ‘장밋빛’ 목표를 제시하는 게 기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윤 장관은 취임사에서도 “경기침체를 하루아침에 정상 궤도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요술 방망이’는 없다”고 잘라 말해 시장의 헛된 기대감을 날려버렸다. 그 대신 경제 주체들이 고통 분담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정책 추진은 과감했다. 추가경정예산 조기 편성, 일자리 나누기(잡 셰어링),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등을 밀어붙였다. 역대급 규모의 추경을 조기에 편성하기 위해 수차례 국회를 드나들며 국회의원들을 설득했다.

국회의원들과 싸우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국정감사 때 국회의원의 질타에도 윤 장관은 “의원님 말씀만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정부 사정도 들어보셔야지요”라며 할 말을 다 했다. 두둑한 배포와 포용력 덕분에 그는 기재부 내에서 ‘다거(大哥·맏형)’로 불렸다.

2009년 0.3%까지 떨어졌던 경제성장률이 2010년에 6.2%로 급반등했다. 해외 언론들은 “교과서에 교재로 삼을 법한 경제회복”이라고 치켜세웠다.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V자 경제 반등을 ‘윤증현 효과’로 인정했다.

진념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2001년 1월에 취임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의 여진이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그는 취임 후 기자간담회에서 “앞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청와대나 여당의 정치적 요구가 있더라도 ‘노(NO)’라고 해야 할 때는 ‘노’라고 분명히 말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장관으로 재직한 1년 3개월 동안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만들어진 각종 기업 관련 규제를 철폐했다. 정치권과 금융당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소득세 법인세 양도소득세 세율 인하 방침을 밝혔다. 진 장관은 오랜 공직생활에서 오는 카리스마와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소신 있는 경제 정책을 펼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김동연 기재부 장관이 조만간 교체될 것이란 예측이 많다. 1년 5개월째 한국 경제를 총지휘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물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약점이다. 법인세 인상, 최저임금 인상 등 기업과 자영업자들을 옥죄는 정책이 실시될 때 김 장관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물론 김 장관에겐 시어머니가 너무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에 기여한 정치인들이 국토교통부, 행정안전부, 해양수산부, 교육부 등에 수장으로 앉아 있으면서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정책을 서슴없이 발표했고, 김 장관이 뒷수습했다. 장관급이지만 권한과 역할은 그 이상인 대통령정책실장도 사사건건 김 장관과 충돌하고 있다.

그런 파워 게임에 김 장관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면서 기업들은 그의 발언에 대한 신뢰를 거두고 있다. 다음 기재부 장관은 윤 전 장관과 진 전 장관이 보여줬던 소신과 강단까지 갖춘 인물이 선임되길 고대한다.
 
박형준 산업1부 차장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