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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의, 한국계에 의한, 세계를 향한 드라마 나온다

입력 | 2018-10-30 03:00:00

[스마트시대 문화전쟁 글이 무기다]
<5> 커지는 아시아의 목소리와 애플 제작 드라마 ‘파친코’




소설 ‘파친코’를 쓴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민진 작가. 이민진 작가 홈페이지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시트콤 ‘김 씨네 편의점’…. 최근 아시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주목받은 콘텐츠다. 특히 모든 배우를 아시아인으로 캐스팅한 ‘크레이지…’는 앞서 10년 동안 개봉한 로맨틱코미디 영화 중 최고 성적을 거두며 할리우드를 놀라게 했다. 기뻐하기엔 이르다. 애플은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에 버금가는 대규모 역사 드라마를 제작할 예정이다. 원작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로, 지난해 뉴욕타임스(NYT)가 선정한 ‘최고의 책 10’에 포함됐다. 》

애플은 최근 10억 달러(약 1조1425억 원)를 투자해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었다. 10여 개 작품은 각본이 완성됐고 5, 6개 작품은 각본을 준비 중이다. 이 중 하나가 ‘파친코’다. 원작 주인공이 한국인이며 부산 영도와 일본이 배경이어서 배우 대부분이 아시아인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한인 이민자 가족 4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대사도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구성된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는 일본 사회에서 구성원으로 인정받고자 처절히 애썼던 한인 이민자 가정의 4세대에 걸친 이야기다. 문학사상 제공

소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한국을 떠나 일본과 미국으로 간 이민자들의 처절한 삶을 그렸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국을 떠난 사람들은 식민 지배, 제2차 세계대전 등 무거운 역사의 굴레에 짓눌린다. 미국 공영 라디오방송 NPR는 “승자의 역사가 지우려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풍부하게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파친코’가 드라마로 제작되는 과정에는 할리우드의 두 한국계 여성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국 굴지의 엔터테인먼트 에이전시 WME의 에이전트 테리사 강, 미국 드라마 ‘더 테러(The Terror)’, ‘더 위스퍼스(The Whispers)’ 등을 제작한 쇼러너(작가) 수 휴가 주인공이다.

○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재미교포 2세인 테리사 강은 캘리포니아주의 비디오 대여점 딸이었다. 마틴 스코세이지 등 다양한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자라며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일하기를 꿈꿨다. 강 씨가 일하고 있는 WME는 1898년 설립돼 찰리 채플린, 엘비스 프레슬리, 메릴린 먼로가 속했던 미국 굴지의 에이전시. 해외에 진출한 영화감독 박찬욱, 봉준호와 배우 배두나, 이하늬도 WME와 계약을 맺고 있다. 박찬욱 감독이 BBC 드라마를 제작하도록 연결해 준 에이전트도 강 씨다.

에이전트는 작가와 감독, 프로듀서, 배우를 연결하고 계약과 협상 과정을 돕는다. 쇼가 만들어진다는 정보를 발 빠르게 입수하고, 적합한 작가와 연출자를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기에, 할리우드에서 에이전시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작가, 연출자가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돕습니다.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거죠. 고객이 ‘이런 아이디어가 있는데 어떻게 만들지?’ 하고 물어보면 제가 전화를 돌리기 시작합니다.”

최근에는 쇼 전체를 기획해 적합한 제작자와 방송국을 찾아 ‘프로젝트’도 만드는 추세다. 강 씨는 “모두가 ‘노’라고 할 때부터 내 일이 시작된다. 대본을 방송사에 보내는 건 쉽지만, 작품으로 만드는 건 유명한 아티스트라도 결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할리우드에선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의 이야기가 점차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미국 TV 에이전트인 테리사 강은 “할리우드에 종사하는 다양한 아시아계 동료들과 꾸준히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테리사 강 제공

어릴 적 영화를 보여줬던 아버지는 딸이 거물급 감독과 작업하는 이야기를 듣고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강 씨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아쉬움이 있었다. 미국인으로 자랐지만, 자신과 피부색이 같은 아시아인은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닌 악역이나 조력자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 씨는 동양인은 물론 흑인, 라티노, 성소수자, 여성 등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작가와 일할 때 특히 보람을 느낀다. 그가 보기에 할리우드에는 다양한 시각의 작품이 여전히 부족하다. 소수자가 주인공인 대본을 주면 “대중이 낯설어한다”거나 “이런 이야기는 충분하다”며 덮어버린다.

“평범한 드라마부터 범죄물까지, 백인 남성이 등장하는 드라마는 널렸어요. 그런데 ‘이제 그만 만들자’고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내가 어릴 때 한국인은 조연만 할 수 있는 줄 알았어요. 9개월 된 제 아들이 자기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랐으면 해요.”

○ “내 역사를 딛고 선 느낌”

미국 드라마 작가인 수 휴도 강 씨의 추천으로 드라마 ‘파친코’ 제작에 참여했다. 수 휴 제공

부산에서 태어난 수 휴는 한 살 때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어릴 때부터 소설을 사랑했던 그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학보사에서 일하고, 소설을 쓰던 그는 열세 살 무렵 연출자의 꿈을 키웠다. 그에게 TV는 이미지로 펼쳐지는 소설이었다. 예일대를 졸업하고 서던캘리포니아대 필름스쿨에 입학했다.

중간급 작가였던 그는 ‘더 위스퍼스’를 통해 총책임자인 ‘쇼러너’로 발돋움했다. 스티븐 스필버그도 참여한 이 드라마는 아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미지의 존재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다. 휴는 원작 소설에 상상력을 덧입히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스필버그가 제작한 세 개 작품에서 함께 일했다.

휴처럼 중간급 작가에서 총책임자로 건너뛰는 건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참신한 시각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기회가 생기고 있다. 할리우드는 그만큼 ‘절박할 정도로’ 신선한 목소리에 목말라 있다. 휴는 “경력이 많지 않아도 경쟁력 있는 스토리만 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가능한 것이 할리우드”라고 했다.

2018년 개봉한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미국 할리우드에서 주·조연급 배우가 모두 아시아인으로 캐스팅된건 영화 ‘조이 럭 클럽’ 이후 25년 만이다. 영화 화면 캡처

휴는 ‘더 테러’ 등 작업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해 수많은 조사를 했다. 그런데 ‘파친코’에서는 자신의 과거, 즉 역사를 딛고 선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것은 내 가족은 물론 전 세계 수백만 난민 가족의 이야기”라고 했다.

휴가 ‘파친코’의 드라마화를 맡은 건 강 씨의 추천 덕분이다. 두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이들을 연결했고, 미국에 없던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아시아인의 이야기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하세요. 많이 읽고 쓰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세요. 할리우드는 독창적인 목소리를 갈구하고 있습니다.”(수 휴)

“미국의 아시아계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색다른 시각의 ‘보고(寶庫)’인 아시아인의 이야기는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겁니다.”(테리사 강)
 
로스앤젤레스=조윤경 yunique@donga.com / 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