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에 불거진 가짜 학회 논란 하지만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도 학회를 빙자해 여행도 하고 있다 과학적 탐구는 여행과 닮은 것… 창의적 연구 생태계를 許하라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매년 10월 초 노벨상이 발표되면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뀌곤 한다. 누구는 몇 년째 백수로 지내는 조카가 장기 불황에 아직도 일자리를 못 구했구나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누구는 허우대 멀쩡한 애가 언제까지 부모한테 얹혀살 건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과학계를 바라본다. 누구는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 형편이 불쌍하고 누구는 노벨상을 못 타는 현실이 갑갑하다.
‘학빙여’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학회를 빙자한 여행’의 줄임말인 학빙여가 최근 과학계에 불거진 가짜 학회, 부실 학술지 논란으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심사 과정이 없는 대신 비싼 게재료를 요구하는 저널에서 논문을 출판하고, 전공과 무관한 참가자들이 유명한 휴양도시에 모여 발표는 제쳐두고 관광에 열중하는 등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일에 국내 유수 대학 연구자들이 연루된 게 드러났다.
학빙여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학회를 빙자해 여행‘만’ 하는 학빙여와 학회를 빙자해 여행‘도’ 하는 것. 전자는 윤리적, 도덕적, 법적으로 모두 잘못됐지만 후자는 윤리적, 도덕적,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학빙여만 하는 것은 본질적 목적인 여행을 위해 가짜 학회를 다녀온 것이기 때문에 공금 유용일뿐더러(불법) 과학자로서의 양심에도 어긋나고(부도덕) 과학계의 집단적 규율에도 위배된다(비윤리). 학빙여도 하는 것은 규정상 공식 일정 앞뒤로 하루씩 현지 체류가 가능하고(합법), 학회 세미나가 24시간 진행되지 않는 이상 자유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것은 개인적으로 떳떳할뿐더러(도덕적), 이미 정평이 난 학회에서도 과학자들의 다양한 교류를 위해 투어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과학계의 집단적 동의도 존재한다(윤리적). 만약 학빙여도 하는 걸 문제 삼는다면 이제껏 수백 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수십 년 넘게 해오던 행위가 모두 불법이고 부도덕하며 비윤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사실 과학적 탐구는 여행과 많이 닮았다.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에서 궁리와 실험의 결과가 어떨까 하는, 기대와 걱정이 섞인 묘한 긴장감은 낯선 땅에서 무엇을 만날지 모르는 들뜬 불안감이랑 맞닿아 있다. 실제 창의성 연구자들이 말하듯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서로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현된다. 이는 훌륭한 과학적 성취에서도 여행처럼 안주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난 경험과 상상력이 중요하단 얘기다.
그뿐만 아니라 여행을 통해 우리는 소수자(minority)가 된다. 과학이 위대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노벨상을 탄 거물 과학자도 오류를 저지를 수 있으며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한 대학원생도 수십 년 의심치 않던 이론을 뒤집는 가설을 제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노벨상이 나올 만한 연구 생태계는 학빙여도 하는 연구자들이 학빙여만 하러 다니지 않는 커뮤니티이고, 노벨상이 나올 만한 연구관리 시스템은 학빙여도 하는 연구자들을 학빙여만 하는 연구자가 되지 않게 돌보는 테두리이다.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