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논설위원
그러나 그의 동료들의 설명은 달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이른바 적폐청산위원회에 불려 다니더니 다른 사람이 된 듯 의욕을 잃어 갔다는 것이다. 그가 적폐위에 소환된 것은 박근혜 정부 때 추진했던 주요 시책 가운데 하나가 그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A 국장과 통화를 마친 뒤 적폐청산이 관행처럼 자행돼온 비리·특권의 청산을 넘어 보수정권의 모든 걸 부정하고 난도질하는 데까지 이른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봤다.
답의 실마리를 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4일 국회연설에서 찾아봤다. 문 대통령은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를 되살렸다”고 거듭 강조했고, 이 대표도 촛불혁명을 6차례 언급했다. 그들의 연설에는 촛불집회는 박근혜 퇴진과 사회경제적 개혁을 요구하는 주권운동 차원을 넘어 나라의 틀을 바꾸라는 혁명이었으며, 따라서 현 정권은 혁명을 완수하라는 국민적 위임을 받았다는 인식이 선명히 깔려 있었다.
어떤 사건을 혁명이라 부르든 말든 그건 각자의 자유다. 그러나 대통령과 여당이 촛불집회와 탄핵, 대선에 이르는 과정을 혁명으로 여기고 있으며, 당시 시민들의 요구가 혁명을 원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그 타당성을 따져봐야 한다.
혁명은 체제의 ‘정당성의 원칙(principle of legitimacy)’이 바뀌는 것이다. 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뀐 프랑스혁명이 대표적이다. 공화정 내에서도 기존 헌정 틀을 벗어난 방법으로 기존 헌법이 무너지고 새로운 헌정체제가 등장하면 혁명이다.
1960년의 4·19 혁명과 1987년의 6월민주항쟁은 그런 의미에서 혁명이었다. 영구집권 체제를 구축한 5공 헌법의 철폐를 요구한 6월항쟁은 참가자들이 강제연행과 직격탄, 죽음까지도 무릅쓰고 시위를 벌여 이뤄냈다.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 1980년대 들어 7년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고민하고 토론하고 끌려가면서 거의 매일 벌인 크고 작은 시위들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봉건적 권위주의를 벗어나는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쳤다.
만약 혁명이 당시 민심의 다수였다면 2017년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탄핵 결정 즈음엔 문재인 후보에 압도적 지지가 몰렸어야 했다. 하지만 문 후보 지지율은 2016년 말까지는 20%대, 2017년 3월말까지도 30%대 초반에 그쳤다. 그러다 4월초 후보 확정과 함께 ‘통합’을 강조하면서부터 중도층을 흡수해 지지율 40% 벽을 뚫었다.
물론 혁명이 아니라고 그 역사적 의미가 축소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헌정 수호 운동이었으며 민권운동, 주권운동이었던 촛불집회를 단순히 레토릭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혁명이었다고 규정하면 모든 걸 바꿔야 한다는 집착에 빠지게 된다. 지금 자신들이 밀고 가는 방향이 국민적 동의를 받았다는 오만, 국민의 뜻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