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인은 기여정신 갖추지 못해 무엇보다 존경받는 기업인이 많아져야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바로 몇 달 전에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에 와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끝내고 뉴욕 거리를 시찰했다. 록펠러센터를 둘러본 흐루쇼프 서기장이 “개인 한두 명이 이렇게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는 반면에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 밑에서 고생했겠느냐?”라고 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의 기자가 그에 대한 비판문을 실었다. 흐루쇼프 서기장은 어떤 기업체나 경제 시설이 개인의 명의로 등기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그 사람의 소유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아메리카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학자는 학문을 갖고 사회에 기여하고, 정치가는 정치를 통해 국가의 일을 돕듯이 기업가는 경제활동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다. 기업가가 소유하는 것은 그 기업의 경영권이고, 기업가는 거기에서 얻어지는 잉여 재산을 사회에 제공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학자는.
아메리카 초창기에는 미국 경제가 개인의 소유 체제였다. 그러나 소유에는 한계가 있고 경제 규모가 커질수록 재산은 사회의 공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200년이 지난 현재, 기업인은 사회에 대한 기여체제로 탈바꿈하지 않는 한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이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상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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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미숙하기는 하나 지금까지 비슷한 노선을 지켜왔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두 가지 큰 과제가 남아 있다. 그 하나는 큰 기업체의 총수들이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격과 기여정신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래전 일본의 소니사 간부가 회사 설립의 목표가 무엇이었느냐는 한국 기자의 질문에,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는 직원과 근로자들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돕는 책임이다”라고 대답했다. 20여 년 전이다. 내가 다닌 모교의 경제학 교수가 한국에 왔을 때였다. 고려대의 조기준 교수가 ‘일본 경제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가’라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일본의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모두 좌경해 있을 때였는데도, ‘정치 지도자들을 믿고 따르느냐’는 물음에 여론조사 결과 40%가 ‘그렇다’고 했는데, 기업계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60%가 긍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소망하는 일은 존경받는 기업인이 많아지는 것이다. 유한양행의 창설자인 유일한, 한국유리의 사장이었던 최태섭과 같은 지도자 정신이 아쉽다. 언제, 어느 사회에서나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들이다.
북한의 경우는 우리와 반대였다. 기업체의 사장과 지주들은 노동자, 농민의 원수라고 모두 추방했다. 노동자, 농민을 대표하는 공산당이 경제 전체를 장악하고 운영했다. 북한 경제는 100% 국가가 관리하는 경제 국가주의를 택한 것이다. 그 결과가 북한 동포의 빈곤을 초래했다. 우리 사회에도 좌파 경제학자가 있고 한때 운동권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그럴 수 있다. 사상에는 유일성이나 절대이념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책임 맡고 있는 국가의 경제 분야에서는 독선적인 판단이나 정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국가경제의 장래와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행복을 정책의 수단이나 방법으로 삼는 일은 용납될 수가 없다.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