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저하게 공정 잃은 합의’ 등 보험사가 작위적 해석할 부분 많아 보험금 지급거절-소송 방패로 악용 美-日선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게 가독성 테스트 거치고 만화 등 활용
하지만 괄호 아래에 명시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는 ‘업무상 질병’이 업무상 재해라고 돼 있었다. 직원 B 씨의 사인은 ‘급성심장사’로 대법원 판례에서도 업무 연관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보험사는 약관을 근거로 “질병 사망은 보험금 지급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약관의 유리한 부분만 취사선택한 것이다. A 씨는 금융감독원에 분쟁조정을 신청했고 금감원은 A 씨의 손을 들어줬다. 금감원은 “보험사가 약관을 명확하게 표기하지 않았고, 보험 가입자의 책임을 확대하거나 유추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 보험 약관은 ‘기울어진 운동장’
2년 전 집에서 갑자기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숨진 C 씨의 가족도 보험금을 못 받을 뻔했다. 보험사에 급성심근경색증 진단비 3000만 원을 청구했지만 보험금 지급을 거절당했다. 보험사는 “약관에 보험 가입자가 이미 사망했을 때는 해당 진단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부검 결과’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생전에 징후가 없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경우에는 진단 기록이 없어 보험금을 줄 필요가 없는 셈이다. 금감원은 “병원 검안서도 진단으로 해석할 수 있다”며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전문가들은 보험사 약관이 회사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지적했다. 약관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놓고 보험금 지급 거절 사유나 민원 소송의 방패로 악용한다는 것이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대표는 “현재 보험 약관은 보험사가 작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며 “공급자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약관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외래어, 법률용어 뒤섞인 암호문
‘표준이율’ ‘상실수익액’ ‘맥브라이드식 후유장애 평가방법’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합의’ 등은 평가 때마다 수정 사항으로 지적되지만 그대로다. 이영우 보험개발원 약관업무팀장은 “약관의 이해도를 평가할 수는 있지만 보험사들이 이를 수정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소비자 권익을 위해 보험 약관을 최대한 친절하게 풀어쓴다. 미국은 1978년부터 가독성 테스트를 시행 중이다. 짧은 단어와 문장으로 약관을 작성하도록 유도해 가입자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다. 일본은 가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만화 등 별도의 설명자료를 만든다. 김은경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보험사들은 약관이 금융당국의 표준 약관에서 크게 벗어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며 “표준 약관부터 용어를 쉽게 고치고 사례 위주로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박희영 인턴기자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