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청약 당첨취소 흐지부지
“걸리더라도 벌금만 내면 된다. 최대한 빨리 팔면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한다.”
사업가 윤모 씨(72)는 가족들에게 주택 청약과 관련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젊은 시절 건설업에 종사했던 윤 씨 부부와 두 딸은 최근 3년간 ‘돌아가며’ 주택 청약에 당첨됐다. 그것도 경기 하남시, 위례신도시 등 경쟁률 수백 대 1을 기록한 인기 지역만 골라 분양받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법 행위가 있었다. 아내는 홀로 재산 없이 사는 것으로 위장해 ‘저소득층’ 청약에 당첨됐다. 자신과 딸들은 장애인 명의의 청약저축 등 당첨 확률이 높은 통장을 사들여 분양을 신청했다. 그는 아파트에 당첨된 뒤 몇 개월 안 돼 1억∼1억5000만 원의 웃돈을 받고 분양권을 모두 팔아 치웠다. 아직 정부에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설령 적발되더라도 매각 취소가 어려울 것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정청약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윤 씨와 같은 사례를 양산하고 있다. 15일 본보 취재 결과 3년 전인 2015년 국내 10대 건설사에서 적발된 부정청약 124건 중 단 1건만이 청약 취소됐다. 주택업계에서는 당국이 2012년 이후 관리하고 있는 부정청약 1556건 대부분이 이와 비슷한 상태일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1500명이 넘는 실수요자가 마땅히 분양받았어야 할 주택을 받지 못하게 됐다는 의미다.
건설사들에 따르면 청약계약 취소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지연 통보’다. 현행법상 부정청약이 적발되었을 때 계약 취소는 주택사업자가 한다. 하지만 ‘정부가 부정청약 의혹 발견→경찰 수사 의뢰→경찰로부터 수사결과 접수→사업자(조합이나 시행사)에 부정청약자 통보→시공사(통상 건설사)에 명단 전달’ 과정을 거치면 통상 2, 3년이 걸린다.
2015년 한 해에 20건 가까운 부정청약자가 적발된 A 건설사는 “당시 적발된 건을 살펴보니 대부분 2012년 분양 단지”라며 “이미 ‘업자’들이 다 팔고 나갔는데, 살고 있는 실거주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법률 공방이 길어지면서 통보가 늦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B건설사는 “2015년에 적발되었다는 부정청약자 명단이 아직도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대해 국토교통부는 “법원 판결이 늦춰져서 그런 것 같다”고 설명했다. 부정청약자들이 앞에서는 법률 공방을 벌이고 그 기간 동안 뒤에선 주택 분양권을 팔고 나가버릴 수도 있다는 의미다.
부정청약자들은 임의규정인 청약 취소 외에 어떤 처벌을 받게 될까. 청약통장을 불법으로 사고팔거나 위장전입을 하다 적발되면 징역 3년, 벌금 3000만 원 이하의 처벌을 받는다. 또 최장 10년간 청약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국토부에서조차 “부정청약 초범자는 100만∼200만 원 정도의 벌금만 낸다. 부정청약으로 얻는 이득에 비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말이 나온다.
정부는 부정청약자의 계약 취소가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담당 실무자들조차 “황당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국토부 측은 “몇 번 부정청약자들의 청약취소를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주택법 개정안을 마련했지만, 국회 문턱을 통과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부정청약 문제로 취소되는 청약계약 건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파악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책임 방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건설사 역시 “손바뀜이 일어난 주택은 우리가 계약 취소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은 “그동안 주택법이 부정청약자 사후 처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부정청약자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도록 이들을 제대로 처벌하는 법 개정 방향을 고민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현실적으로 청약 취소가 어려우면 부정청약자를 대상으로 한 부당이득 환수 등의 처벌규정을 강화해야 정부가 ‘책임 회피’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재명 jmpark@donga.com·강성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