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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언의 마음의 지도]성찰로 사느냐, 투사로 투사가 될 것이냐

입력 | 2018-08-10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

세상 사람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게 중요한 사람, 중요하지 않은 사람, 매력이 있는 사람, 평범한 사람, 같이 있고 싶은 사람, 멀리 두고 싶은 사람…. 결혼하고 싶은 사람, 절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사람…. 일단 나누고 봅니다.

사람을 처음 만나서 맺는 관계는 매우 이성적인 판단을 따를 것 같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논리보다는 감정이, 현재보다는 과거가 지배합니다. 모자관계가 좋았다면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닮은 여성을 더 좋아하고, 부녀관계가 좋았던 딸은 아버지를 닮은 남성을 선택합니다. 정반대도 흔합니다. 그토록 몸서리치게 싫어했던 어머니, 아버지와 닮은 아내, 남편을 택했다는 것을 오랜 세월이 지나 깨닫게 됩니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승리였습니다. 무의식의 힘입니다.

현재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또한 현재는 미래의 과거입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산다고 해도 결국 인생은 과거, 현재, 미래의 틀 안에서 돌고 도는 겁니다. 과거의 경험이 쌓여 작성한 ‘인생 대본’은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다릅니다. 그 대본을 가지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나는 인생이라고 하는 무대 위에서 나름대로 주연의 연기를 펼칩니다. 그리고 내게 중요한 사람들을 조연으로 세워 멋진 무대를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내게 중요한 사람이란 결국 내 인생 대본의 대사에 맞게 연기해 줄 수 있는, 내가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편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 삶에서 지켜야 할 가치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보통사람이든 정치인이든지 간에 편을 가르며 끼리끼리 몰려다닙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분들이 그러시면 국민이 고통받지만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인생 대본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내적 성찰’ 기반으로 작성된 것과 ‘투사(投射)’ 기반의 것입니다. 투사의 사전적 정의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 등을 남에게 돌려 버림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내적 성찰로 인생 연기를 펼치는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도 사회나 국가에 큰 피해를 주지는 않을 겁니다. 내적 성찰 없이, 잘된 것은 무조건 내 덕분이고 잘못된 것은 전부 남의 탓이라며, 투사에 중독 상태라면 투사(鬪士)처럼 보이는 ‘멋진 인생’을 살지 모르지만 그 폐해는 주변에 널리 깊게 미칩니다.

투사(鬪士)의 논리 체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흑백(黑白)논리입니다. 나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빼앗습니다.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됩니다. 아군, 적군으로 쪼개서 투쟁하는 분할(分割)의 논리인데 심층심리학에서 보면 유아(乳兒)의 특징입니다. 젖에 매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젖먹이는 세상을 ‘좋은 엄마’와 ‘나쁜 엄마’로 나누며 삽니다. 좋은 엄마는 가까이, 나쁜 엄마는 멀리합니다. 결국 같은 엄마 속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함을 알고 하나로 통합된 어머니의 그림을 마음에 새기게 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발달학적 과업이 실패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을 흑, 아니면 백으로 나누어 봅니다.

두 종류 인생 대본처럼 세상의 많은 일은 언뜻 나누어 비교하면 차이점과 삶의 방향이 선명해집니다. 학생 때 비교표를 만들어 공부하면 효율적이고 시험 점수도 잘 나왔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눌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가족 중에 미운 사람이 있어도 가족을 가족과 가족 아닌 사람으로 나눌 방법이 없지요. 사회적 계약으로 맺어진 부부의 경우는 이혼이 가능합니다만…. 미술의 세계를 구상과 추상으로만 엄격하게 분할한다면 둘이 섞인 작품은 설 곳이 없어지고 작가의 창의성은 크게 훼손될 겁니다.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 중에서 반드시 택일해야 한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물론이고 행정, 입법, 사법, 교육, 의료, 기업 경영 등도 혼란에 빠질 겁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를 혼란스럽게 붙들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살피면 각각의 장단점이 보입니다. 우회전만 계속해도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좌회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지럽기만 합니다. 장애물로 직진이 여의치 않은 것이 세상 이치라면 때로는 좌회전을, 때로는 우회전을 해야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우회전이나 좌회전 반복이 그래도 목적지에서 더 멀어지는 유턴보다는 낫다고요?

국가 경영은 물론이고 개인의 삶에서도 흑백논리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흑과 백 사이에 수많은 회색이 존재함을 알면 융통성을 발휘하는 통합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국민 개개인도 적절하게 좌파적으로, 우파적으로 생각을 바꿔 실천해야 국가의 진정한 통합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개인의 무대, 나라의 무대, 여러 나라가 출연하는 국제무대에서 현재 우리는 어디에 서 있을까요? 요점은 오래전 이미 지나간 흑백영화처럼 지루한, 흑백논리와 투사의 무대에서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과거에만 연연하지 않고 미래의 과거인 현재를 알차게 채워 후손들에게 넘겨줄 수 있을 겁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