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수강 인원이 적어 절대평가가 이뤄지는 과목도 있지만 이때도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추가 신청자가 생겨 상대평가로 바뀔 위기에 처하면 ‘마지막 신청자’ 색출·토벌 작전이 전개된다. 기존 신청자들이 해당자를 단톡방(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초대해 수강을 철회할 때까지 회유하거나 협박한다.
8월은 이제 첫 학기를 마친 1학년생들이 휴학을 고민하는 시기다. 주요 로펌들이 1학년 성적 우수자를 ‘입도선매’하기 때문이다. 휴학 후 학원에서 다음 학기 예습을 하는 1학년생이 적지 않다. 휴학 요건이 출산이나 심각한 질병 등으로 제한돼 있지만 학생들은 우울증, 공황장애 소견서를 내민다. 자살 기도라도 할까 봐 학교는 거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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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로스쿨이 기존 사법시험 제도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 만큼 내실을 갖춰야 한다. 우수 인재를 선별할 잣대도 필요하다. 하지만 사법연수원 성적으로 줄 세우던 폐해를 줄이려 도입한 로스쿨이 지금처럼 학점 노예를 양산한다면 바라던 변화는 아니다.
연세대 의대는 4년 전 본과생 대상 절대평가를 시작했다. 매 학기 과목별 기준치를 제시하고 도달 여부만 따졌다. “이를 악물고 하면 A학점 받을 학생들이 C학점 수준에 안주할 것”이란 우려가 많았다. 올해 초 졸업한 첫 ‘절대평가 세대’ 122명이 보여준 결과는 반대였다. 의사국가고시 합격률 98.6%. 이 대학 최근 5년간 합격률 중 최고치다. 합격자 120명의 평균 점수(301점)도 전체 합격자 평균(286점)보다 월등히 높다.
상대평가는 우열을 가리는 데 유용하지만 정작 학생이 요구되는 능력을 갖췄는지는 살피기 어렵다. 실력이 모두 미달이어도 1, 2등은 나오기 마련이다. 이에 비해 절대평가는 등수보다는 학생이 꼭 필요한 실력과 자질을 갖췄는지에 중점을 둔다.
경쟁적인 환경에서 더 뛰어낸 인재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미국 스포츠과학 저널(Journal of Sports Sciences) 연구를 보면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소도시(5만 명 이하)에서 자란 선수가 프로 리그에서 뛰는 비율이 인구 분포 대비 2배가량 높았다. 미국 인구의 25%가 소도시에 사는데 미국미식축구리그(NFL)와 미국프로골프(PGA) 선수 중 소도시 출신은 50%에 달했다. 덜 경쟁적인 여건에서 지속적인 격려를 받은 선수가 더 큰 잠재력을 갖는다는 게 연구팀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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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평가에 단련된 일부 변호사는 노트 필기와 시험 족보를 꽁꽁 숨기던 습관이 몸에 배어 같은 사건을 맡은 동료 변호사들과도 소송 기록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고 한다. 절대평가를 경험한 연세대 의대생들의 소감은 사뭇 다르다. “남을 제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내 실력으로 수술방에 설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홀로 투쟁한 4년이 아닌 동기들과 함께 성장한 4년.” 이들은 절대평가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로 ‘연구’와 ‘봉사활동’을 가장 많이 꼽았다.
우리는 큰 병에 걸리거나 인생의 고비를 맞았을 때 어떤 교육을 받은 의사와 법률가에게 의지해야 할까.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