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23>퇴직한 가장, 어깨 펴는 법
■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마음에 큰 상처
처음엔 많이 노력했어요. 20년 이상 몸담은 회사를 떠난 남편이 너무 안쓰럽고, 남편의 축 처진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참 속상했죠. 남편 기죽이고 싶지 않아 직장 다닐 때처럼 밥도 꼬박꼬박 차려주고, 빨래며 청소며 예전처럼 제가 다 했답니다.
하지만 저도 점점 지쳐갑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날이면 세 끼를 다 챙겨줘야 하는데 제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때로 너무 힘들고 화가 납니다. 저도 평생 집안일을 했는데, 왜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쉬지 못하는 걸까요?
더욱이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을 생각하면 집에 있는 남편에게 도통 좋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퇴직금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대학 등록금은 어찌 해야 할지 하루에도 몇 번씩 한숨만 나옵니다.
결국 오늘 터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에게 “앞으로 계속 이러고 살 거야? 삼식이 짓 좀 그만해”라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갔죠. 상처받은 표정을 보니 미안했지만, 이렇게 몇십 년을 더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부부가 함께 행복하게 지낼 접점이 있을까요?
■ 제2의 인생 찾으려는 노력, 가족이 응원을
나도 언젠가 퇴직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적응이 쉽진 않아. 그렇게 긴 시간을 회사에 쏟았는데, 직장을 나오고 나니 남은 게 하나도 없네. 퇴직금만으로 남은 30∼40년을 어떻게 버틸지 앞이 캄캄하고, 우리 애가 직업 없는 아빠를 부끄러워할까 위축도 되고….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눈치챘겠지.
그래도 힘이 되는 건 역시 가족뿐이야. 회사 출근 마지막 날, 짐을 싸 집에 왔을 때 당신과 아들이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고마워요”라고 말해줬지. 그때 눈물이 날 뻔한 걸 간신히 참았어.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이가 “아빠, 걱정 마. 나도 열심히 할게”라고 할 땐 신기하고 대견하더라.
그래도 퇴직 후 찾아오는 우울함은 어쩔 수가 없더라고. 다시 일하고 싶지만 이 나이에 직장 찾기가 어디 쉽겠어? 솔직히 당신이 무심코 던진 말들이 큰 상처가 돼. 당신이 며칠 전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 왔을 때 베란다에 가득 쌓인 빨랫감을 보고 “나 없을 때 집안일 좀 해놓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했잖아. “나도 바쁘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세탁기 사용법을 잘 몰라. 순간 내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됐구나 싶었지. 이제부터 당신이 집안일을 가르쳐주면 나도 열심히 해볼게.
나는 애하고 대화하는 게 참 어려워. 그동안 해 뜨기 전 집을 나서서 해진 뒤 집에 들어왔으니 제대로 얼굴 볼 시간이 없었잖아. 말을 걸어보려 하는데, 막상 기회가 생겨도 할 얘기가 없더라고. 결국 “공부는 잘되니?”로 시작한 대화의 마지막은 늘 “아빠랑 얘기하면 짜증 나”란 말로 끝나더라고. 쾅 닫히는 문을 볼 때면 자식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 더 슬퍼. 주말에라도 “아빠, 같이 영화 보러 갈래?” 하고 말을 걸어주면 정말 고마울 텐데….
먼저 요리부터 배워보려고 해. 요샌 퇴직하고 요리교실을 다니는 이들이 많더라고. 아내 없이 밥 잘 챙겨먹는 게 퇴직자의 첫 번째 매너라면서? 나도 집 근처 복지관에서 하는 요리교실을 다음 주부터 나가볼까 해. 평생 나한테 밥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는 내가 당신 밥 차려주는 남편이 될게. 또 조만간 취직자리가 생길 테니 너무 돈 걱정 하지 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앞으로도 서로 믿고 의지하자.
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도움말: 우리마포복지관 서울시50플러스재단 부천인생이모작지원센터 한국남성의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