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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배극인]‘24시간 불 꺼지지 않던 나라’ 이제는

입력 | 2018-06-23 03:00:00


배극인 산업1부장

월드컵 시즌이다. 요즘은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네덜란드식 ‘토털 사커’가 대세라지만, 예전엔 나라마다 독특한 축구 스타일이 있었다.

네 차례나 월드컵 우승컵을 거머쥔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가 첫손가락에 꼽힌다. 빗장 수비라는 의미인데, 상대의 파상공세를 조롱하듯 지켜내다 카운터펀치 한 방에 승리를 따내는 작전이다.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던 도시 국가 간 전투에서 성문을 잠근 채 버티다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으로 단번에 적장의 목을 따내 승전을 확정짓던 작전 그대로다. 재미없는 경기에 열광하며 발을 구르는 서포터들은 후방 보급부대와 다름없다.

잉글랜드 축구의 대명사는 ‘킥 앤드 러시’였다. 안개와 비가 많은 날씨와 무관치 않다. 세밀한 패스와 정교한 팀플레이보다는 상대 수비라인 뒤로 단번에 볼을 차 놓고는 전력으로 달려 승부를 결정지었다. 전차군단 독일 축구도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체력과 스피드를 앞세운 돌파와 센터링, 압도적인 키와 체격을 이용한 헤딩슛. 1970년대 후반 정부의 ‘골든 플랜’에 따라 뒷골목과 공터가 아니라 학교와 클럽에서 선수들이 육성되면서 직선적인 승부 스타일이 자리 잡았다.

브라질 ‘삼바 축구’도 빼놓을 수 없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원주민인 인디오, 포르투갈 이주민, 흑인 노예 이주민이 뒤섞인 ‘인종 전시장’이다. 다양한 인종을 ‘삼바 축구’라는 이름으로 묶어 낸 브라질은 축구의 신천지를 개척했다. 20세기 끝 무렵엔 프랑스가 이를 이식했다. 알제리 출신 지네딘 지단을 비롯해 티에리 앙리, 릴리앙 튀랑 등 검은 피까지 대거 수혈해 ‘아트 사커’로 꽃피웠다.

아시아 대표 주자인 한국과 일본 축구도 스타일이 확연히 달랐다. 황선홍 최용수 등 원 톱 스트라이커를 최전방에 세운 채, 긴 패스와 측면 돌파로 한 방에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스타일은 독일에 가까웠다. 반면 일본은 오밀조밀한 미드필드 플레이를 중시했다. 그러다보니 스트라이커보다는 나카타 히데토시 등 플레이메이커들이 당대의 스타였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 스타일은 속도와 근성을 중시하는 목표 지향주의 성향의 한국, 절차와 매뉴얼을 중시하는 완벽주의 성향의 일본 사회를 투영한다는 평가도 있다.

축구와 마찬가지로 경제에도 스타일이 있다. 그리고 그 스타일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풍요의 상징이던 패권국가 미국은 무역과 재정,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며 어느 순간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며 한때 접었던 제조업 부활에 나섰고, 전 세계에 무역전쟁의 포화를 쏘아올리고 있다. 바캉스와 복지 천국 유럽도 신발 끈을 다시 매고 있다. 특히 독일에 뒤처진 프랑스는 약 20년 전 도입한 ‘주 35시간 노동제’의 경직성을 깨는 노동개혁에 나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은 이런 나라들과 달리 일주일 뒤 근로시간을 오히려 단축하는 미증유의 항해에 나선다. 외국인들 사이에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한국 특유의 역동성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삶의 방식도 바뀔 것이다. 유럽에 비해 겨우 균형을 맞추는 수준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한국 경제 특유의 속도와 근성을 가볍게 버려선 곤란하다는 우려가 많다. 넋 놓고 ‘저녁이 있는 삶’을 만끽하기엔, 가진 자원도 부족하고 기업경쟁력도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탄력근로시간제 적용 기간 확대 등 보완 조치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미증유의 항해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꿀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풍랑을 만나도 살아남을 수 있게, 구명보트와 조끼도 넉넉히 갖추고 길을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다.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