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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철희]김정은의 본전 생각

입력 | 2018-05-25 03:00:00


이철희 논설위원

너무 순조롭다 했다. 연초 신년사부터 숨 가쁜 속도전이 진행됐다. 그래서 김정은을 달리 보는 이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북한의 갑작스러운 어깃장에 모두 ‘그럼 그렇지’ 혀를 찼다. 그런데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북한의 고전적인 벼랑 끝 전술이 또다시 먹히는 분위기다.

북한이 대화 무드에 급제동을 걸며 빌미로 삼은 것은 맥스선더 한미 연합 공군훈련이었다. 거기에 존 볼턴 미국 안보보좌관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를 정조준했다. 핀포인트 저격은 성공한 듯 보인다. 연합훈련에선 핵우산 핵심 전력인 전략폭격기 B-52가 빠졌다. 볼턴은 일단 입을 다물었고, 태영호는 어제 국가정보원 산하 조직에서 나갔다.

당초 김정은은 통 크게 주고 통 크게 받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권좌에 오른 이래 핵무기 완성을 위해 질주했고 그렇게 완성된 패를 가지고 큰 판을 만들 만큼 전략적 인물이었다. 김정은은 북-미 정상회담 일정에 합의하기까지 자신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의구심을 씻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초기 투입 비용도 감당하는 것처럼 보였다.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는 그 나름의 야심작이다. 이미 억류했던 미국인 3명도 내줬고, 회담 장소도 좀체 내키지 않는 싱가포르를 수용했다. 거기에 좀 더 센 것을 보여주려 했다. ‘미래 핵’ 포기 의지를 보여주는 이벤트로 폭파 장면만 한 게 없다. 그런데 이런 액션에도 실질적으로 손에 쥔 것은 없다. 북한은 여태껏 ‘공짜 쇼’를 한 적이 없다. 2007년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면서 미국에서 중유를 챙겼고 테러지원국 해제까지 얻어낸 북한이다.

결국 김정은은 본전 생각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옛날 버릇으로 돌아갔다. 아마 내부에서도 불만이 나왔을 터. “미국에서 나오는 험한 소리들은 승전국이 패전국에나 요구하는 완전 무장해제가 아니고 뭔가. 믿었던 남쪽은 미국만 쳐다보고 손사래를 치는데 마냥 기다려야 하나.” 중국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차이나 패싱’에 발칵 뒤집혔던 중국이 후원자를 자처해 줬으니, 김정은은 이제 손해를 벌충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으리라.

한창 급가속으로 달리다 급제동이 걸리면 그 충격과 저항이 만만치 않다. 세상사 예외 없는 관성의 법칙이다. 그래서 판을 뒤엎겠다는 위협에 한미 양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지사지를 내세웠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잠시 말을 아꼈다.

하지만 상대는 트럼프다. 디테일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지만 손익계산은 빠르고 분명하다. 진의 파악을 위해 일단 달래야 한다는 판단에 체제 안전을 보장하겠다며 경제 번영도 기약했다. 하지만 기실 밑도 끝도 없는 립서비스일 뿐이다. 트럼프는 북-미 수교도, 평화협정도, 제재 완화도 거론하지 않으면서 정상회담 ‘재고려’ 위협에 ‘무산’ 카드를 흔들었다.

김정은은 아마도 트럼프를 정치적으로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로 옭아매는 데 성공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그런 덫은 통하지 않는다. 도박사 트럼프에겐 이런 상황이 오히려 엔도르핀을 돌게 하는 게임이다. 어쨌든 판은 커졌고 적당한 타협은 어렵게 됐다.

협상이든 전쟁이든 큰 국면을 보지 못하는 얕은 계산으론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당장의 본전을 생각하다 보면 단기적 흥정이나 전투에선 이길 수 있을망정 진짜 빅딜이나 전쟁에선 패배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김정은은 어렵게 쌓은 작은 믿음과 기대마저 잃을 처지에 놓였다. 신뢰 없는 배짱은 불한당의 객기일 뿐이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