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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名문장]굴종(屈從)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

입력 | 2018-03-03 03:00:00


양은우 작가

《“적은 수의 그리스 군대가 승리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한 불가사의한 결과는 단순히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의 승리가 아니라, 굴종과 비열한 약탈에 대항하는 그리스인들의 자유의 승리, 그리고 권력욕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티엔 드 라 보에티 ‘자발적 복종’》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그리스에 영토를 헌납하도록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러자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간다. 페르시아군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그리스 군사들은 마라톤 평원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워 승리한다. 절대 열세였던 그들이 승리한 이유를 프랑스의 철학자 라 보에티는 자유에 대한 의지 때문이라 말한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 중 하나가 자유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라 보에티는 자유를 향한 숭고하고 거룩한 헌신이 아닌 자발적 복종을 얘기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에 대한 열망을 품고 태어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권력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다”고 했다. 갈수록 불확실성이 커지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래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권력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적어도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을 상실할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우산 안의 삶은 대가를 요구한다. 라 보에티는 이를 두고 자발적 복종이라 비판하였지만 이건 자발적 복종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강요된 굴복, 즉 굴종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에 대한 굴종은 폭력을 만들어낸다. 권력을 가진 사람을 폭군으로 만든다. 굴종의 강도가 커지고 숫자가 많아질수록 폭군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폭군은 이 책이 쓰인 16세기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 모든 구석에 뿌리 깊이 존재한다.

검찰 내부로부터 불거져 문화예술계와 사회 각 분야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성추행 문제는 권력의 힘이 만들어낸 굴종의 사례다. 언젠가는 터져야 할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진실은 명백하게 밝혀져야 하고 쉬쉬하며 감추어 두었던 추악한 사회의 단면들은 양지로 끌어내어져야 한다. 바로잡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투명성은 확보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

자유는 거절에서 온다. 지금까지는 힘 있는 자들이 미래의 두려움을 무기로 힘없는 자들에게 굴종을 강요해 왔다. 이제 두려움 때문에 굴종의 길을 걷기보다 당당하게 거절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세상은 용기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바뀌어 간다. 굴종을 벗어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양은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