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링 女대표팀 선전으로 들썩이는 의성 현지 르포
경북 의성여고에 걸린 현수막. 동문인 김영미, 김은정, 김경애, 김선영 선수의 사진이 보인다.
경북 의성이 어디 있는지 잘 몰라도 의성 하면 으레 마늘이 떠오른다. 의성은 국내 최고 품종인 한지마늘 생산지다. 의성은 조선 중기부터 맛좋은 ‘육쪽마늘’로 유명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상품의 마늘로 만든 흑마늘진액, 마늘즙 같은 제품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마늘=의성’이라는 공식이 자리 잡았다. 또 과거 씨름을 즐긴 세대라면 의성 출신의 걸출한 천하장사 이만기, 이봉걸이 떠오를 수도 있다.
컬링 규칙 몰라도 응원하는 마음은 뜨거워
하지만 최근 의성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는 컬링이다. 지방 소도시 의성에서 세계 컬링을 흔드는 선수들이 나오자 해외 유수 언론들도 의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갑작스러운 의성 붐이 가장 즐거운 것은 군민들이다. 동네에서 잘 알고 지내던 이가 국가대표로 나온 것도 신기한데 세계적 컬링스타로 거듭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니 놀라우면서도 자랑스러운 것.
광고 로드중
시장과 상가가 밀집해 있는 경북 의성군청 앞 거리. 컬링 국가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군청 근처 부동산공인중개소에서 TV를 보며 담소를 나누는 세 어르신을 만났다. 이들에게 김은정, 김영미 등 컬링 선수들의 이름을 거론하자 “아, 철파리 그 아!”라는 반응이 바로 튀어나왔다. 철파리는 김영미, 김경애 자매의 집이 있는 마을이다. 세 어르신 가운데 컬링 전문가로 불린다는 이모(73) 씨는 “선수들 이름 대면 의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 사람 건너면 전부 아는 사이고, 선수들은 얼굴을 익히 알던 처자들이다. 친숙한 얼굴이 올림픽 국가대표로 나와 승승장구하니 일단 컬링 중계가 시작되면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응원한다”고 말했다. 지역 군민 가운데 일부는 강원 강릉컬링센터로 원정 응원을 다녀오기도 했다.
군민에게 컬링 선수들은 친숙한 대상이었다. 이날 만난 군민 가운데 다수가 각 선수의 이름을 대면 ‘딸 부잣집 딸’ ‘동네 처자’ 등 그들만의 방식으로 바꿔 불렀다. 더불어민주당 김현권 의원(비례대표)도 마찬가지. 의성 출신인 김 의원은 2월 18일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김은정 선수의 아버지는 농기계 끌고 나락 베고 탈곡하는 일을 다녔고 어머니는 가마를 움직이는 보조원을 했다. 딸 부잣집 어린 둘째딸은 동네 아무 집이나 들어가 ’아지매 밥 묵었나? 나도 밥도(줘). 같이 묵자‘ 하며 넉살 좋게 자랐다’고 친분을 밝혔다.
나도 컬링 해볼까
광고 로드중
의성의 10대는 공부는 몰라도 컬링에 대해서만큼은 전국 최고 이해도를 자랑한다. 의성에 있는 컬링장(경북컬링훈련원)에서 적어도 한두 번은 컬링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고 꽤 많은 학생이 방과후 활동으로 컬링을 즐긴 경험이 있기 때문. 남민우(18) 군은 “체육시간에 컬링 경기를 보러 간 적이 꽤 있어 대충 규칙은 안다. 중학생들은 방과후 활동으로 컬링을 선택한 비율이 늘었고, 전업 선수를 준비하는 학생도 많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경북 의성군 경북컬링훈련원에서 컬링 경기를 하는 모습.
임양의 친구인 오윤진(16) 양은 “컬링을 열심히 해 좋은 성과를 거두면 실업팀에도 갈 수 있지만, 문이 워낙 좁은 데다 컬링이 비인기 종목이라 컬링에 흥미가 있는 친구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며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컬링 대표팀이 전국적인 스포츠 스타가 되자 다시 도전해보겠다고 나서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동네에서 알던 사람이 대표팀으로 스타가 되자 과거 해프닝도 군민에게는 추억거리가 되고 있다. 김모(20·여) 씨는 “경북컬링훈련원 근처에 사는 지인이 있는데 올림픽 6개월 전쯤 인터넷 쇼핑으로 고기구이용 돌판을 구매했다. 그런데 배달 실수로 돌판이 훈련원에 배달됐다. 배달 실수를 확인한 지인이 훈련원 측에 돌판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마침 비슷한 제품을 훈련원에 있는 대표팀도 구매했던 모양이다. 이미 강릉으로 돌판을 가져갔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이에 지인은 대표팀이 사용한 돌판이니 나중에 돌아오면 기념으로 받아 간직하겠다며 술자리에서 자랑했다”고 말했다.
광고 로드중
좋은 일로 취재진 방문은 10년 만에 처음
치킨집을 운영 중인 주봉래(42) 씨는 “이 동네는 월드컵 한일전을 한다고 치킨이 더 팔리는 곳이 아니다. 컬링 경기를 해도 마찬가지인데 지역 분위기는 2002 한일월드컵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컬링 경기 중계시간에는 거리에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2월 20일 의성여고 강당에서 열린 단체 응원전에는 300명 넘는 군민이 모여 함께 응원을 했다. 숫자가 적어 보이지만 전체 인구가 5만3000여 명인 의성에서 300명은 비율로 따지면 서울에서 6만 명이 모인 격이다. 군청 관계자는 “23일 준결승전 때도 단체 응원을 한 계획이다. 이때는 500명 이상 모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번 일로 군청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동안 마늘 이외에 새 특산품, 역사 유적 등 다양한 홍보 활동을 통해 의성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을 계기로 의성이 명실상부 한국 컬링의 성지가 되자 의성군청에 취재 문의가 쏟아지고 있는 것.
의성군 관계자는 “군청에서 일한 지 7년 가까이 됐는데 단 한 번도 좋은 일로 취재진이 방문한 적이 없다. 대부분 조류독감, 구제역 등 나쁜 소식에 대한 질문만 들어왔다. 하지만 컬링 대표팀 덕에 군 분위기가 좋아져 군청에서도 다들 즐겁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신은 의성 출신이 주축을 이룬 한국 컬링 여자 국가대표팀에 의성을 대표하는 특산물 마늘을 따 ‘갈릭 걸스’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마늘이라는 별명은 식상한 모양이다. 김민정 여자 대표팀 감독은 “대표팀도 마늘 관련 별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선수들인 만큼 ‘마늘 소녀’보다 더 예쁜 별칭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밝힌 바 있다.
마늘이 가장 유명하지만 의성은 마늘 외에도 다양한 특산물이 있다. 신승호 의성군 홍보계장은 “의성의 자두 생산량은 국내 1위다. 질 좋은 복숭아와 청송 사과 못지않게 당도가 높은 사과도 나온다. ‘의로운 쌀’ ‘의성황토쌀’ 등 의성의 브랜드 쌀도 시장에서 좋은 품질을 인정받았다”고 밝혔다.
의성=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