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1973년 여의도 집회에 가보지 못했지만 그 못지않게 컸던 1980년 여의도 집회에는 가봤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인 설득보다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이었다. 말 한 단락이 끝나기도 전에 김장환 목사의 통역이 따발총처럼 이어졌다. 나중에 세계침례교총회장까지 된 김 목사가 유명해진 것은 1973년 집회의 통역을 맡으면서부터. 하지만 거꾸로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 출신인 그의 유창한 통역이 없었다면 설교의 감동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레이엄 목사는 1950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 북한 공산당 격퇴를 촉구하고 1952년 전쟁 중인 한국을 방문해 집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90년대 두 차례 방북해 김일성과도 만났다. 김일성은 트루먼 이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 조언자였던 그레이엄 목사와의 만남을 마다하기는커녕 미국과의 대화 채널로 활용하려 했다. 그레이엄 목사로서는 평양에 외국인을 위한 교회를 짓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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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