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변주의 미학, 본질을 꿰뚫다

입력 | 2018-02-20 03:00:00





수묵화와 사진, 그리고 서양화.

최근 각각 개인전을 열고 있는 박대성(73) 정재규(68) 김현식 작가(53)의 전공 분야다. 얼핏 쉽사리 접점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세 미술가는 의외의 공통점을 지녔다. 사진이긴 한데 사진이 아니며, 수묵화라지만 현대미술 향취가 짙고, 서양화이건만 동양적 기법이 두드러진다. 강력한 KO펀치를 지닌 변칙복서라고나 할까. 미지의 변주를 선보이는데 오히려 본질을 꿰뚫는 세 작가의 작품을 살펴봤다.

○ 찰나의 탈바꿈

정재규 작가의 ‘경주-94’(122×184cm). 197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1994년 여름 경주에 방문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머리 없는 불상의 ‘참혹하나 여전히 조화롭고 완전한 조형미’를 갖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정재규 개인전 ‘조형 사진―일어서는 빛’은 말로 풀기가 참 애매하다. 한눈에 봐도 근사하긴 한데, 그 함의를 건져내긴 쉽지 않다. 다만 조형 사진이란 사진을 포함한 기존 이미지를 해체해 재조립하는 걸 지칭하는 용어다.

정 작가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하나 또는 여러 이미지를 가늘고 길게 절단한다. 이를 가로 세로 ‘베틀이나 올을 짜듯’ 교차 배열한다. 이 과정에서 전혀 다른 이미지가 탄생하고 때로는 3차원 착시도 일어난다. 정 작가는 “마르셀 뒤샹(1887∼1968)이 작가의 개입을 통해 기성품을 미술품으로 바꿔놓았듯, 정보를 전달하는 사진을 조형적인 예술 언어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로 프랑스에 거주한 지 40년을 맞는 작가의 작품엔 조국을 향한 오마주도 물씬하다. ‘경주’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2015년부터 항암치료를 받느라 쇠약해진 그지만, 작품을 설명하는 눈빛엔 20대 청년의 도전정신이 뜨거웠다.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갤러리. 02-720-1020

○ 빛의 울림

김현식 작가의 ‘Zero 1’(102×102×6cm)은 영화 스타워즈에서 우주선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장면이 떠오른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김현식 작가의 작품도 참 오묘하다. 평면화인데 입체화 같다. 빛의 잔향이 선처럼 가득 차 있다. 해외에선 이를 두고 ‘작품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은 매우 고되다. 일단 투명한 에폭시 레진(열경화성 수지)을 바른다. 건조되는 레진에 선을 그어 홈을 낸 뒤 물감을 칠한다. 이를 닦으면 홈이 파인 부분에 물감만 남는다. 고려청자에 문양을 새기던 상감(象嵌) 기법을 구현한 셈. 김 작가는 “이런 과정을 7∼10번 되풀이한다”며 “한 작품에 최소 1개월 이상 걸린다”고 말했다.

전시작품 46점에 펼쳐진 빛의 만찬은 배가 부를 정도. 전시 제목 ‘빛이 메아리친다’처럼 머나먼 우주에서 마주한 듯한 색감이 경이롭다.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종로구 학고재갤러리. 02-720-1524

○ 이상향의 여백

소산(小山) 박대성의 개인전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는 제목이 전시 방향을 잘 드러낸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소산의 그림엔 큐비즘과 초현실주의, 미니멀리즘, 극사실주의 등이 담겼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적 수묵화지만, 서양 추상화나 정물화가 겹쳐 보인다.

전통적인 수묵화인데도 서양 정물화 분위기가 상당한 박대성 작가의 2014년 작 ‘고미(古美)’ 44×45cm. 가나문화재단 제공

하지만 작법과 별개로 박 작가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동양회화에서 추구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공력이 엿보인다. 묘사 대상의 기질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최고 이상의 경지’를 일컫는다. 소산은 “내 일생을 다 보여주는 전시”라고 말했다. 다음 달 4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02-736-1020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