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병원 화재 참사]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
구조된 환자 긴급 이송 불이 난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 옆 세종요양병원에 입원했다가 가까스로 구조돼 장례식장에 대피 중이던 한 노인 환자가 119대원에 의해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고 있다. 세종요양병원에는 치매 등을 앓는 노인 환자 94명이 입원해 있었다. 경남도민일보 제공
간호를 천직으로 알던 아내였다. 간호조무사 김모 씨(37)의 남편은 26일 아내의 시신을 확인하고는 망연자실했다. 이날 오전 7시 반경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을 덮친 화마(火魔)가 아내를 앗아갔다. 남편 김모 씨는 “아침에 아내가 전화를 했다. ‘살려줘. 병원인데 불이 크게 났어’라고만 말하고 끊겼다. 1분 뒤에 다시 전화가 왔는데 ‘살려줘’라고 하더니 또 끊겼다”고 말했다. 김 씨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 “엄마, 어떡해” 전화만 남기고…
맏딸로서 집안의 기둥이었던 간호사 김모 씨(49)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72)를 모시고 살다가 변을 당했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다 2015년 면허증을 따고 간호사가 됐다. 김 씨는 간호사가 된 이후 세종병원에서 일했다. 이날도 어머니가 건넨 주스를 마시고는 “너무 맛있다”며 너스레를 떨고 출근했다. 김 씨 어머니는 “7시 35분쯤 딸이 전화를 했는데 ‘엄마, 엄마, 어떡해, 어떡해’만 하더니 끊겼다. 연기를 얼마나 마셨는지 얼굴이며 콧구멍이 새까맣고 손에는 피가 묻어 있더라”라며 가슴을 쳤다.
○ “춥다고 퇴원을 미뤘는데…” 망연자실
어머니 현모 씨(89)의 사고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달려온 김모 씨(63)는 전날까지만 해도 설 연휴를 함께 보낼 생각에 들떠 있었다. 지난해 퇴직한 코레일에서 근무할 때 연휴는 언감생심이었다. 이제야 가족과 첫 연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3층 병실에 있던 어머니는 미처 대피하지 못했다. 평생 시골에서 고추와 깻잎 농사를 지으며 자신을 뒷바라지한 어머니였다. “며칠 전 어머니를 퇴원시키려고 했는데 날이 너무 추워 노인에게 안 좋을까봐 미뤘다. 그게 천추의 한”이라며 비통해했다.
2층 병실에 입원해 있다 숨진 김모 씨(60)는 이날 더 큰 병원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지난해 11월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와 오른팔 등을 다친 김 씨는 일주일 전까지 남편과 함께 세종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남편은 상대적으로 빨리 회복해 퇴원했다. 그러나 부러진 뼈를 고정하기 위해 핀을 박은 부위의 부기가 빠지지 않아 김 씨는 퇴원을 미뤘다. 남편 박모 씨는 “어제 의사 설명을 듣고 오늘 큰 병원으로 옮기기로 마음을 굳혔는데…”라며 한숨만 쉬었다.
○ 손으로 긁어 문 열고 피신한 환자들도
겨우 목숨을 구한 환자도 있었다. 5층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김모 씨(89)는 병실 미닫이문을 손으로 박박 긁어서 열고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마침 그를 발견한 소방대원이 업어서 구출했다. 김 씨는 “틀니고 시계고 지팡이고 다 두고 나왔다. 살아 있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203호 병실에 있던 양모 씨(66·여)는 “방에 남아 고래고래 살려달라고 소리 질렀다. 숨진 사람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떨면서 말했다.
치매 환자들은 불이 났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서도 겁에 질렸다. 한 달 전 입원한 정모 씨(86·여)는 “나는 그냥 들고 다니던 수건으로 입을 막고 나왔다. 옥상에서 보니 연기가 말도 못 할 정도던데…”라고만 했다. 정 씨의 딸은 “병원에 불이 났다는 것도 잘 모르신다”고 말했다.
밀양=권기범 kaki@donga.com·정현우·유주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