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도심서 자취 감춘 콜레라, 바다에 숨어 있었네”

입력 | 2017-12-09 03:00:00

[토요화제]‘감염병과의 전쟁’ 최일선에 선 역학조사관들




충북 청주시 오송 질병관리본부 긴급상황센터는 감염병 방역체계의 ‘심장부’다. 모니터링 요원 8명과 역학조사관 2명이 24시간 상주하며 국내와 전 세계 감염병 발생 현황을 살핀다. 현재 40석 규모지만 내년 8월경 100석 규모의 새 건물로 이전한다. 청주=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홍콩국제공항.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년 여성(귀네스 팰트로)이 밭은기침을 한다. 원인 불명의 신종 감염병이 전 세계를 휩쓰는 상황을 그린 영화 ‘컨테이젼’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여성이 홍콩에서 옮겨온 감염병은 처음에 아들에게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돼 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요즘 감염병은 비행기 속도로 퍼진다.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감염병이 언제든지 국내로 들어올 수 있다.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그랬다. 의학이 발전하듯 감염병도 진화해 신종 감염병은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르는 ‘사회적 지뢰’다.

이런 ‘감염병과의 전쟁’의 최일선에 역학조사관이 있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감염병의 전파 경로와 원인을 규명하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범죄 단서를 찾듯 환자의 분뇨와 쓰레기통, 폐쇄회로(CC)TV, 카드 사용 기록까지 뒤진다.



○ 15년 만에 등장한 콜레라균, 바닷물에서 찾다

지난해 8월 방역 당국은 비상이 걸렸다. 국내에선 15년 만에 경남 거제시에서 콜레라 환자가 나왔다. 메르스처럼 치명적인 감염병은 아니지만 사라진 줄 알았던 감염병의 재등장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감염 경로 파악이 급선무였다. 역학조사관과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등 40여 명이 동원됐다.

콜레라 환자는 단 3명. 지인이 거제 인근 바다에서 직접 잡은 삼치회를 먹은 70대 할머니, 거제의 한 식당에서 전복과 농어회를 먹은 50대 남성, 거제의 한 시장에서 구입한 정어리와 오징어를 직접 요리해 먹은 60대 주민이었다.

역학조사는 △시간 △사람 △장소 등 3가지를 비교해 환자 간 공통분모를 찾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들 3명의 동선은 전혀 겹치지 않았다. 이들을 모두 만난 사람도 없었다. 유일한 공통점은 거제 인근 바다에서 잡은 수산물을 먹었다는 점. 방역 당국은 환자들이 먹은 생선의 유통 경로를 추적했다. 식당과 시장은 물론이고 생선을 납품한 유통업체의 도마, 수족관까지 싹 검사했지만 콜레라균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오직 바닷물뿐이었다. 시시각각 조류의 영향을 받는 바닷물에 아직도 콜레라균이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거제의 한 항구에서 채취한 바닷물에서 환자들이 감염된 콜레라균이 나왔다. 이후 추가 환자는 없었다. 기존 환자 3명은 모두 완치됐다. 15년 만에 등장한 콜레라 사태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당시 역학조사와 방역을 진두지휘한 이동한 질병관리본부 감염병감시과장은 “정말 운이 좋은 경우였다”고 회상했다.

○ 역학조사가 없었다면…

불과 20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역학조사는 없었다. 콜레라나 페스트 등이 지금은 공포의 감염병이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대규모 인명 피해로 이어졌다. 과학적 역학조사가 처음 이뤄진 건 1854년 영국 런던에서다. 마취과 의사 존 스노는 런던의 콜레라 환자 수가 동네마다 다른 점에 주목했다. 환자 발생 지역을 지도에 표시한 그는 우물 근처에서 집중적으로 환자가 생긴 점을 ‘발견’했다. 이후 우물을 폐쇄하자 환자는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콜레라균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감염 경로를 파악해 대유행을 막은 첫 사례였다.

현대적인 역학조사관 제도는 1951년 미국에서 처음 생겼다. 국내에는 2000년 도입됐다. 1기 역학조사관 20명은 모두 공중보건의사였다.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이들을 교육한 강사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공중보건의사는 의무복무 기간(3년)만 근무해 전문성을 키우기 어려웠다.

결국 14년간 공중보건의사에게 의존하던 역학조사관 제도는 메르스 사태를 겪은 뒤 대폭 손질됐다. 2015년 의사, 간호사, 보건학 학위 소지자를 대상으로 한 전문임기제 역학조사관을 처음 채용했다. 정원도 크게 늘어 100명을 넘었다. 현재 질병관리본부와 지자체 소속 역학조사관 105명 중 38명이 이때 이후 뽑힌 전문임기제 역학조사관이다.

○ 메르스 의심 환자가 사라진 그날

질병관리본부 감염병관리과의 장윤숙 역학조사관도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17년 경력의 간호사 출신이다. 원래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감염 관리 업무를 맡았지만 메르스 사태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 병원 의료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어요. 정부와의 협조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실감하고 새로운 일에 눈을 뜬 거죠.”

장 조사관에게 지난해 4월 13일은 ‘특별한 날’이다. 이날은 20대 총선 선거일이었다. 하지만 이날 오전에는 메르스 감염이 의심되는 중동 여성이 사라졌다는 게 더 큰 뉴스였다. 아랍에미리트(UAE) 국적의 20대 여성은 이날 오전 1시경 서울 강북삼성병원을 찾았다. 의료진은 메르스 의심 환자로 보고 격리하려 했으나 여성은 거부했다. 잠시 감시가 소홀한 사이 여성이 홀연히 사라졌다. 장 조사관은 이날 새벽 연락을 받고 급히 질병관리본부 긴급상황센터로 출근했다.

다행히 경찰의 협조로 이 여성의 소재를 파악했다. 하지만 외국 국적 여성이라 물리력을 동원했다가는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결국 UAE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환자를 격리했다. 메르스 대응 지침을 만드는 업무를 담당하는 장 조사관은 이날 이후 외국인 의심 환자 관련 내용을 추가했다.

○ 끝나지 않는 감염병과의 전쟁

메르스 의심 환자는 지금도 수시로 생기지만 더 이상 혼란은 없다. 의료기관은 의심 환자를 우선 격리한 뒤 질병관리본부나 보건소에 신고한다. 의심 환자 신상과 증상, 조치 등 각종 상황은 질병관리본부 담당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파된다. 38명이 숨진 메르스 사태를 겪은 뒤 얻은 값비싼 교훈이다.

메르스 사태 이후 국가방역 체계가 대폭 손질됐다. 감염병별 대응 지침과 매뉴얼을 현실에 맞게 고쳤다. 또 역학조사를 거부하면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지난해 1월부터는 24시간 감염병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비상시 ‘컨트롤타워’가 되는 긴급상황센터가 운영 중이다.

메르스 의심 환자는 올해에만 188명(12월 7일 기준). 하지만 모두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질병관리본부는 늘 긴장 상태다. 영화처럼 단 1명이라도 걸리면 대규모 유행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2009년 유행한 신종인플루엔자가 그랬다. 멕시코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온 50대 수녀가 첫 번째 감염자였다. 이 수녀가 접촉한 사람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10만 명 이상이 신종인플루엔자에 감염됐다. 대규모 예방접종을 위해 군부대까지 동원한 뒤에야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감염병이 없어지는 건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라질 때일 겁니다. 절대 끝나지 않는 전쟁이죠.” 긴급상황센터를 관리하는 질병관리본부 위기대응총괄과 조상연 팀장(역학조사관)의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불안해하며 살 수밖에 없나. 영화 ‘컨테이젼’에서 역학조사관으로 나오는 에린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즐릿)는 신종 감염병 때문에 불안에 떠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발 손으로 얼굴 좀 그만 만져요.” 질병관리본부가 강조하는 감염병 예방수칙의 첫 번째는 손 씻기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