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철 사회부 차장
정부의 여러 부처 중에서도 국정원은 손가락 안에 드는 엘리트 조직이다. 직업 공무원의 인기가 지금보다는 못하던 시절에도 국정원은 명문대 졸업생들이 재수, 삼수를 하며 들어가려고 줄을 서던 곳이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 왜 이리 망가졌을까. 그 답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쑥대밭이 된 문화체육관광부를 보면 알 수 있다.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블랙리스트 사업에 소극적이었던 이들은 대부분 쫓겨나거나 인사 불이익을 당했다. 반대로 청와대의 지시를 받들어 블랙리스트 실행에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정권이 바뀌면서 감옥에 갔다.
반면 윗선의 명령에 따라 불법에 가담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선택지였다. 정보기관의 캐비닛이 열리고 조직이 저지른 불법이 폭로되는 건 혁명이 일어나거나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안 일어날 확률 낮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정농단 사건이나 탄핵의 기폭제가 된 ‘촛불혁명’ 같은 건 당연히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나’ 욕을 하면서도 명령에 따르는 것은 국정원 직원들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단지 불법인 줄 알고도 따랐다는 이유로 ‘생계형 범죄자’인 하급자가 형사처벌을 받는 상황은 가혹하다. 검찰 수사와 형사 처벌은 적폐청산 TF의 저인망식 훑기가 아니라 책임이 확실한 사람만 겨눠야 한다.
국정원의 실무자들에게 형사적 관용을 베푸는 일은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 국정원 직원들은 국정원장의 지시는 곧 국가의 지시라고 믿고, 언제라도 따라야 하는 이들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국가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에도 복종해야 한다. 이번처럼 조직이 시키는 일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간다면 앞으로 누가 국정원장의 지시를 따를 것이며, 그런 정보기관을 어디에 써먹겠는가.
2013년 여름 ‘댓글 사건’ 수사 때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법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공소장에 포함시켰다. 그 대신 원세훈 전 국정원장 한 사람만 기소했다. 정치 상황이 바뀌고 수사를 막는 장애물이 사라졌지만 무엇이 국익인지는 여전히 고민해볼 일이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