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이 ‘2018 평창’에게… ]<중> 한반도 올림픽=평화 올림픽
1988년 9월 17일 오전 11시에 열린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인 160개 참가국을 상징해 160명으로 구성된 기수단이 올림픽기를 든 채 잠실주경기장에 입장하고 있다. 성화는 낮 12시 41분에 점화됐다. 동서 진영 갈등으로 반쪽 대회였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81개국이 참가했다. 동아일보DB
올림픽 헌장(Olympic Charter·2013년 개정판) 제1장 1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시대에 따라 이 내용을 담은 조항의 순서가 다르기는 했어도 올림픽의 기본 정신이 평화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헌장은 헌장일 뿐이었다. 1988년까지는 그랬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얼마 앞둔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올림픽에 불참하겠다”고 통보했던 미국은 소련이 움직이지 않자 말을 실천에 옮겼다. 한국을 포함해 서방 국가들도 미국과 함께했다. 소련은 4년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 때 ‘불참 보복’으로 맞섰다. 모스크바 대회 직전에 열린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도 온전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인종차별 정책을 폈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럭비 교류’를 한 뉴질랜드가 올림픽에 참가하자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거 불참했다. 몬트리올 대회 직전에 열린 1972년 뮌헨 올림픽은 피로 얼룩진 최악의 대회였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허술한 선수촌 경비를 뚫고 이스라엘 선수 2명을 죽이고 9명을 납치했다. 그들은 뮌헨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인질도 모두 죽였다. 대회는 개최라도 했지만 1896년 첫 근대 올림픽 이후 아예 치르지 못한 대회도 3차례(1916년 베를린, 1940년 도쿄, 1944년 런던)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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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올림픽은 변방에 있던 대한민국의 위상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됐다. 소련과 처음으로 민간 교류를 시작했고 중국과의 관계도 급속도로 발전했다. 서울시가 발행한 ‘서울 올림픽 백서’에 따르면 1988년에 중국을 방문한 한국 기업인 수는 1987년보다 20배가 늘었다. 한국은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 수교한 데 이어 당시 동유럽 공산국가들과도 잇달아 국교를 수립했다. ‘평화 올림픽’이 가져다준 외교 성과였다.
서울 대회 이후 올림픽은 큰 탈 없이 이어졌다. 1993년 유엔 총회가 올림픽 휴전에 관한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게 든든한 배경이 됐다. 수단 내전 등 크고 작은 분쟁이 올림픽 개·폐막 1주일 전후로 멈췄다.
최근 상황은 급변했다. 사라졌던 벽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국경에 장벽을 쌓았다. 러시아, 중국, 일본도 내셔널리즘을 앞세워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고 있다.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도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달 30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평창 올림픽 평화가 강물처럼’이라고 직접 쓴 글씨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시체육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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