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그리는 여자들/프랜시스 보르젤로 지음/주은정 옮김/368쪽·2만5000원·아트북스
폴란드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1898∼1980)가 1929년 프랑스 파리에서 그린 유채화 ‘녹색 부가티를 탄 자화상’. 뜨거운 관능을 가둬낸 냉정한 눈빛의 이미지를 통해, 남다른 열정과 배짱으로 사회의 보수적 편견과 맞섰던 작가의 삶을 읽을 수 있다. 사진 출처 wikiart.org
서문 첫머리에 적힌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읽어볼 가치가 있다.
미술사회사학자인 지은이는 주로 백인 남성이 기술한 ‘반쪽짜리 미술사’가 간과했던 여성 예술가의 기록을 모았다. 16세기부터 현대까지 그려진 여성 자화상 200여 점을 소개하고 작가들의 삶을 들여다 본 것이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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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재현할지 남성만큼 치열하게 고민한 여성 미술가가 항상 존재했다는 사실은 미술사에서 은폐됐다. 여성 미술가들은 미술계에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판단, 견해, 규정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할 수 없는 소수였다. 여성이 미술계에 진입하기 위한 조건을 결정하는 것 역시 남성 몫이었다.”
유럽의 미술학교가 19세기 후반이 돼서야 여학생을 받았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들여다보면 그림 하나하나가 특별해 보인다. 저자는 “여성의 자화상은 언제나,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과 미술가에게 기대하는 것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작업이어야 했다”고 썼다.
현대로 넘어오기 전에 이 두 가지 기대는 전적으로 상충했다. 이런 상충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 작가들이 선택한 길은 무엇이었을까. 책은 남성 작가 자화상과 차별되는 여성 작가 자화상의 특징을 조금씩 더듬어 엮으며 답을 찾아나간다.
“여성 작가들이 찾은 해법은 ‘창조적 수동성’이었다. 비평가들의 반응을 예상해 허를 찌르고자 했던 여성 작가의 욕망을 이해해야만, 그들의 자화상이 왜 그런 모습으로 제시됐는지 알 수 있다. 과거에 여성 미술가는 그들의 뛰어남을 표출하고 싶으면서도 ‘으스대는 것처럼 보이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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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화가 자비네 레프지우스(1864∼1942)가 1885년 그린 자화상. 베를린 내셔널갤러리 소장. 아트북스 제공
18세기 유럽의 여성 예술가 지망생들은 남성 동반자 없이 미술관 내부를 돌아다닐 수도, 나체 모델을 보고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다. 드로잉 기술은 자수 문양을 가다듬는 데 사용됐다. 그런 불합리한 억압 속에서도 자아를 드러내고자 한 여성 예술가들의 열망은 또렷한 자취를 남겼다. 자취를 엿보는 것만으로 감히 무언가 더 이해하게 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야를 가리고 있던 방해물이 조금은 치워진 기분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